'줌마 탐정' 최강희, 시청자를 체포하다
‘클리셰(cliche)’. 자주 사용하는 활자를 넣은 판을 뜻하는 인쇄 용어다. 비평가들은 틀에 박힌 듯 전형적이거나 진부한 이야기 소재나 표현, 흐름 등을 지적할 때 이 단어를 많이 사용한다. 서부극 총잡이들의 대결이나 로맨스물의 해피엔딩 등이 대표적 클리셰다. 하지만 이런 장르적 클리셰를 잘 활용해 허를 찌르는 작품도 종종 있다.

KBS 수목드라마 ‘추리의 여왕’(사진·극본 이성민, 연출 김진우 유영은)은 뻔한 추리극의 클리셰와 예측 불허의 의외성을 넘나드는 좋은 예다. 결혼 8년차 유설옥(최강희 분)은 검사 남편에 박사 시누이를 모시고, 깐깐한 시어머니가 건재한 시월드(시집)에서 눈치 보며 살아가는 평범한 주부다. 시어머니가 먹고 싶다는 것은 무엇이든 싹싹하게 해내지만 손맛은 별로다.

장보러 갔다가 마트 도둑을 관찰력 하나로 잡아낸 설옥은 파출소장의 신임을 얻어 동네 사건·사고 해결의 멘토가 된다. 그중 하나가 시장 사물함 도난 사건. 단순한 절도 사건 같아 보이는데, 설옥이 “마약범이 연관돼 있다”고 단언하자 순경들은 황당해한다. 하지만 ‘마약견’으로 불리는 형사 하완승(권상우 분)의 수사 동선과 설옥의 추리 흐름이 겹치며 사건 정황이 드러나자 설옥은 단번에 동네 경찰관들의 ‘선생님’으로 등극한다.

관찰과 추리로 주변인보다 먼저 사건의 본질을 꿰뚫어보는 것은 ‘셜록 홈스’(코난 도일 추리소설 주인공)부터 ‘명탐정 코난’(아오야마 고쇼의 추리 만화 주인공)에 이르기까지 일관된 탐정의 클리셰다. 중요한 것은 그런 추리를 하는 방법과 범인을 알아내기까지의 과정이다.

이 드라마는 젊은 주부 캐릭터에 배우 최강희의 매력을 더해 사랑스럽지만 똑 부러지고 치밀한 설옥을 탄생시켰다. 유명한 할머니 탐정 ‘미스 마플’(애거사 크리스티 추리소설 주인공)과 ‘제시카’(미국 드라마 ‘제시카의 추리극장’ 주인공)의 젊은 시절 현신(現身) 같지만 이들보다 엉뚱하다.

주위 사람들의 삶과 습관을 범행에 적용해 사건 실체를 추리하고 누구든 속내를 털어놓게 하는 친화력은 생활밀착형 여성 탐정의 클리셰다. 사랑스러운 장바구니 패션으로 형사들에게 일침을 날려 그들을 무장해제시키는 설옥은 알고 보면 범죄 관련 공부를 10년 가까이 한 경찰 지망생. 연륜과 혜안으로 승부하는 미스 마플보다 설옥의 추리 과정이 더 체계적인 이유도 여기에 있다.

좌천돼 파출소에 파견된 완승이 “뻔한 사건”이라며 대충 마무리하자 설옥은 “아무나 집어넣고 실적만 쌓으면 그만이죠. 그러니까 자백만 믿고. 무죄라는 증거 하나만 있어도 무죄예요”라고 일침을 가한다. “능력 없으면 방해나 하지 말라”는 설옥의 핀잔에 완승이 다시 한번 사건을 돌아보는 과정은 셜록 홈스와 왓슨 박사 콤비를 연상케 한다. 그러고 보니 설옥과 완승도 셜록과 왓슨에서 따온 것은 아닐까?

4회 말미에 등장해 신비감을 더한 현직 검사 김호철(윤희석 분)은 설옥의 남편이지만 권력형 비리와 연관돼 있다. 범행 앞에서는 무엇과도 타협하지 않는 설옥이 “가족이 좋다면 나 하나쯤은 희생해도 된다”고 할 정도로 소중히 여기는 가족의 또 다른 얼굴에 어떻게 대처할까.

이주영 방송칼럼니스트 darkblue888@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