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밤 회식 자리에 가보니 알겠더라. 해양대 선배인 과장을 가운데 앉히고 후배인 국장이 과장한테 형님, 형님 하면서 충성하는 문화더라.” 민간기업 출신으로 경제부처에서 차관을 지낸 H씨는 세월호 참사를 계기로 드러난 ‘해피아(해양수산부+마피아)’의 적폐를 이렇게 전했다.

#2. “요즘은 저런 학교 출신도 여기 오느냐.” 덕수상고 출신으로 국제대를 졸업한 뒤 1982년 공직에 막 입문한 김동연 국무조정실장(장관급·행시 26회)의 귓전을 때렸던 말이다.
일러스트=추덕영 기자 choo@hankyung.com
일러스트=추덕영 기자 choo@hankyung.com
‘KS 라인’의 선민의식

박근혜 대통령이 29일 혁파하겠다고 선언한 관료집단 내 소수 인맥의 독과점은 부처 곳곳에 존재하고 있는 강력한 ‘이너 서클’(인맥 중심의 내부 파벌)을 뜻한다. 이들은 주요 보직을 번갈아 맡고 정책 입안과 시행을 둘러싼 파워게임을 벌이면서 서로 끌어주고 밀어주는 폐해를 낳고 있다. 부처 산하기관이나 민간협회로 ‘낙하산’을 탈 때도 특정 인맥의 끈이 연결된다.

김동연 실장을 아연실색하게 했던 차별적 발언은 특정고-특정대학 중심의 강력한 이너 서클이 지배해온 관료사회의 적폐를 보여주는 것이다. 가장 대표적 학맥은 경기고와 서울대 출신 인맥으로 이른바 ‘KS 라인’으로 불렸다.

1974년부터 서울과 부산을 시작으로 고교 평준화가 실시된 여파로 요즘은 고위 관료들 사이에 KS 라인을 예전만큼 찾아볼 수 없지만 몇 년 전까지만 해도 KS 인맥의 파워는 막강했다. 지금도 관가에 회자되는 경기고 ‘3대 천재론’은 역설적으로 경기고 출신들이 얼마나 선민의식에 빠져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는 지적이다. 이헌재 전 경제부총리, 김중수 전 한국은행 총재, 최중경 전 지식경제부 장관, 장승우 전 해양수산부 장관 등이 주로 거론되는 ‘천재’의 반열이다. 이 가운데 이 전 부총리의 경우 경기고와 서울대 법대 출신 관료들을 중용하면서 ‘이헌재 사단’이라는 신조어까지 만들어냈다.

곳곳에 ‘이너 서클’

KS 라인에 들지 못해 알게 모르게 ‘핍박’을 받았다는 고위 관료들의 하소연도 많다. 명문 사립대 출신으로 나중에 장관까지 지낸 B씨는 과거 외환위기 시절 경기고-서울대 출신 경제부처 장관으로부터 “서울대 안 나온 사람들에겐 도저히 일을 맡기지 못하겠다”는 폭언까지 들은 적이 있다고 털어놨다.

요즘은 서울대 중에서도 법대와 경제학과 출신들 사이에 ‘파벌’이 생겨날 조짐이 있다는 전언이다. 법대 출신인 K 전 기획재정부 장관은 법대 동문회 자리에 나타나 “10년 만에 돌아와 보니 서울대 법대가 손이 끊겨 안타깝다”며 “서울대 법대가 경제학과 나온 사람보다 더 일을 잘한다”고 말해 구설에 오르기도 했다.

외교부에선 외무고시 수석합격자라도 서울대 외교학과 출신이 아니면 고위직 승진이나 미국 등 주요국의 대사직을 따내기가 쉽지 않다는 게 공공연한 비밀로 통한다. 그런가 하면 국세청 고위직에는 대구·경북(TK) 출신이 많다. 국세청 내 2급 이상 고위직 34명 가운데 41.2%인 14명이 TK 출신이다.

교육부엔 서울대 사범대 교육학과 출신들의 이너 서클이 존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문용린 전 교육부 장관(현 서울시 교육감), 이돈희 전 장관, 김신일 전 장관 등이 서울대 교육학과 출신이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파워게임

학맥뿐만 아니라 첫 근무지를 기준으로 배타적 인맥이 형성되는 경우도 많다. 청와대 경제팀과 기재부 내에선 EPB(옛 경제기획원) 인맥과 모피아(옛 재무부+마피아) 인맥 간 알력이 상존하고 있다. 모피아와 EPB는 정권에 따라 희비가 교차됐다.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 시절엔 EPB가, 이명박 정부 때는 모피아가 득세했다.

이명박 정부 시절 조원동 인수위 기획조정분과위원회 전문위원(현 청와대 경제수석)과 강만수 기재부 장관은 악연이었다. 재무부 출신인 강 장관이 당시 이명박 대통령에게 감세를 주장하자 EPB 출신인 조 전문위원은 ‘적절치 않다’고 반대한 것으로 전해졌다. 당시 기재부 1차관으로 거론되던 조 전문위원은 결국 차관 승진을 못하고 총리실 국정운영실장(1급)으로 옮겨갔다.

지난해 3월 기재부 세제실이 EPB 라인인 2차관 소속으로 직제가 변경됐을 때는 모피아 진영의 상당한 반발이 있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표면적인 이유는 세입을 담당하는 세제실이 세출을 담당하는 예산실에 종속되면 재정건전성 등에 문제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면엔 모피아가 EPB에 견제당했기 때문이란 얘기가 많았다.

낙하산 탈 때도 인맥

모피아와 EPB 출신들은 퇴임 후 ‘이헌재 사단’ ‘김석동 사단’ 등의 이름으로 낙하산을 타고 금융업계에 줄줄이 떨어졌다. 금융감독 수장을 지낸 한 인사는 “감독기관장 입장에서 보더라도 우리가 참 너무한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었다”고 털어놨다. 세월호를 침몰로 내몬 해운조합과 한국선급의 요직을 꿰차고 있는 해수부의 경우 한국해양대, 목포해양대 인맥이 유난히 강한 편이다. 해양대 출신들은 선박 안전점검이나 항만, 해상안전, 해난사고 취급 기관의 주요 보직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김홍열/정태웅/김주완 기자 comeon@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