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마을] 시의 미학 시로 말하다
서울 경복궁의 집옥재 양편 기둥에는 ‘太華夜碧(태화야벽) 人聞淸鐘(인문청종)’과 ‘西山朝來(서산조래) 致有爽氣(치유상기)’라는 주련이 대구를 이루며 걸려 있다. 이 중 앞의 구절은 당나라 말기 시인 사공도(837~908)가 쓴 것으로 알려진 ‘이십사시품(二十四詩品·약칭 시품)’ 가운데 다섯 째인 ‘고고(高古)’에 나오는 글귀다.

‘시품’은 시의 미학을 스물네 가지 풍격(風格)으로 나눠 풍격마다 네 글자 12구의 시로 표현한 일종의 시학(詩學) 텍스트다. 이 중 세속을 초월한 고상함과 고풍스러움을 뜻하는 ‘고고’를 표현하면서 사공도는 “…동쪽 하늘에서 달이 떠오르니/ 시원한 바람이 그 뒤를 따라 분다/ 화산의 밤하늘엔 푸른 기운이 감돌고/ 사람들 귀에는 맑은 종소리 들려온다…”고 했다. 주련의 ‘태화야벽 인문청종’은 이 글귀에서 따온 것이다.

겸재 정선의 ‘사공도시품첩’ 중 ‘섬농’. 화사한 봄 풍경을 시로 쓰고 있는 여인을 묘사했다. 문학동네 제공
겸재 정선의 ‘사공도시품첩’ 중 ‘섬농’. 화사한 봄 풍경을 시로 쓰고 있는 여인을 묘사했다. 문학동네 제공
《궁극의 시학》은 안대회 성균관대 한문학과 교수가 ‘시품’의 스물네 가지 미학을 다각도로 들여다보고 그림과 글씨, 인장(도장), 인생의 문제까지 연결시켜 분석한 책이다. ‘시품’의 풍격은 예술미와 인간 정서의 거의 모든 것을 담고 있다. 영웅의 장대한 품격을 표현한 웅혼(雄渾), 맑고 깨끗한 아름다움을 나타낸 충담(沖淡), 곱고 여성적인 정서를 나타낸 섬농(纖禾農), 신선의 풍류가 드러나는 표일(飄逸)….

풍격마다 48자의 한시로 표현해 스물네 가지 풍격을 합쳐봐야 1152자에 불과하지만 시를 시로 논한 탓에 시보다 더 시적이고 난해한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또한 동아시아 미학의 정수로 평가되면서 시품 연구서와 주석서가 많이 나왔고, ‘시품’의 미학을 시뿐만 아니라 그림, 산문, 인장으로 확장하고 표현한 사례도 많았다.

저자는 수많은 사람들이 남긴 ‘시품’ 관련 작품 중에서 조선의 정선과 청나라의 반시직, 장부, 제내방 등 네 명의 화가가 그린 그림과 조선 후기의 명필인 이광사 김정희 권돈인이 쓴 서예작품을 놓고 ‘시품’의 미학을 비교·설명한다.

가령 시품의 세 번째 풍격인 ‘섬농’은 작은 풍경이나 인간의 행동을 시인의 풍부한 감성으로 표현하는 것인데, ‘시품’ 본문에서는 복사꽃이 활짝 핀 봄날 아름다운 여인이 나들이하는 모습으로 표현했다. 정선이 그림을 그리고 이광사가 글씨를 쓴 ‘사공도시품첩’의 ‘섬농’은 버드나무숲과 난만하게 핀 복사꽃을 배경으로 화사하게 차려입은 여인이 나무에 두루마리 종이를 놓고 붓을 들어 무언가 쓰는 모습을 묘사했다. 이에 비해 청나라 반시직의 ‘섬농’은 미인을 뺀 채 복사꽃 가지 끝에 꾀꼬리가 앉은 화조화로 그렸고, 제내방은 약초를 캐러 산을 오르던 두 남자가 산 중턱에서 여인 둘과 맞닥뜨리는 장면을 그렸다.

저자는 이들의 그림과 글씨 외에도 ‘시품’이 다룬 추상적인 언어를 놓고 이광사, 신위, 김정희, 오세창 등 조선 시대 지성인들이 정서적으로 교감한 흔적을 추적한다. 또한 이백 도연명 한유 등 중국 시인들과 채제공, 김득신, 정철, 송강 등 조선 문인들의 작품에 담긴 시적 미학을 보여준다. 예컨대 두보가 비장미의 ‘침착’을 구현한 데 비해 신선의 풍모를 노래하는 ‘고고(高古)’의 풍격은 이백이 가장 잘 보여준다. ‘시품’의 풍격을 알고 시를 읽거나 그림을 대하면 마치 지도를 보고 길을 찾아가는 듯 명쾌하다.

700쪽이 넘는 책의 두께가 부담을 주긴 하지만 책머리의 해제를 읽고 나면 풍격별로 앞뒤 없이 읽어도 무방하다. 깊이 있는 한문학 연구를 바탕으로 대중들을 위해 맛깔스럽게 고전을 해설해 주기로 정평이 난 저자의 글솜씨 덕분에 어렵지 않게 한시와 동양화에 담긴 미학을 읽을 수 있다.

서화동 기자 firebo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