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 4월19일,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이 한국을 찾았다. 여왕은 대통령과 만난 자리엔 하늘색 투피스 정장, 이틀 뒤 안동 하회마을엔 파란색 무늬 원피스와 흰 재킷, 파란 모자 차림으로 나타났다. 알고 보니 그때만 그런 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여왕의 아이콘이 ‘파랑’이란 것이다. ‘보그’ 영국판이 여왕의 지난해 공식 의상을 분석했더니 파란색이 29%로 가장 많고 꽃무늬 13%, 녹색과 크림색이 각 11%, 베이지색 1% 순이었다는 것. 왕실의 관복색(파랑)을 패션코드로 지켜왔다는 얘기다.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총리도 정계 입문 뒤 줄곧 파란색 옷을 입었다. 1979년 보수당 당수로 총리공관에 들어설 때 복장인 청색 재킷과 주름치마는 ‘파워 슈트’의 대명사가 됐다. 대처의 파란색 사랑은 유별났다. 오죽하면 지난 1월 런던에서 열린 영화 ‘철의 여인’ 시사회장에 ‘블루 카펫’을 깔았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파랑은 보수당의 상징색이다. 힐러리 클린턴 미 국무장관의 의상에도 파란색이 많다. 미국에선 청색이 민주당의 이념을 대변하는 까닭이다.

파란색의 역사는 길지 않다. 고대 그리스는 물론 10세기까지 유럽엔 청색이 없었다. 어둡고 불길하다고 여겨진 탓이다. 푸른색이 주목받기 시작한 건 12세기 들어 교회 스테인드글라스에 등장하면서부터. 이후 성모마리아의 옷 색상이 된 데 이어 13세기 영국과 프랑스의 국왕 의상에 쓰이면서 색다른 의미를 지니기 시작했다.
16~17세기엔 부(富)의 상징이 되고, 19세기 말 청기사파에 이르러선 순수함과 남성성·엄격함·지성의 표상이 됐다. 지금은 지구촌 사람 40%가 파란색을 가장 좋아한다는 마당이다. 꿈·명예·희망을 전달한다는 이유다.

괴테는 ‘색채론’에서 색이 생리적·물리적·화학적 특성 외에 감성과 도덕성·상징성을 지닌다고 주장, 인상주의와 추상미술의 근거를 마련했다. 색, 특히 옷의 색상은 메시지다. 스타일도 그렇지만 색을 통해 성격은 물론 취향과 기분, 각오까지 전할 수 있다.

엘리자베스 2세와 대처 전 총리를 비롯, 옷을 통해 왕실 혹은 정당의 가치와 신념을 드러내온 이들과 달리 우리의 여성 정치인들은 여야(與野) 없이 빨간색 재킷을 선호한다. 적극적이고 열정적으로 보인다는 것도 있지만 주로 눈에 잘 띈다는 이유라고 한다.

무슨 색이면 어떠랴. 중요한 건 옷 색깔이 아니라 시류와 개인적 이익에 흔들리지 않고 국민의 행복과 안녕을 지켜내려는 소신을 보여주느냐 여부다. 대처는 매일매일이 전쟁이었다고 고백했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상징적 존재가 아니라 미래의 한국을 책임질 사람이다.

박성희 논설위원 psh77@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