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나라 2대 황제인 양제는 문제(文帝)의 둘째아들이다. 그는 폭군으로 알려져 있고 진시황과도 곧잘 비견된다. 그의 이름은 양광(楊廣)이고 대업(大業)라는 연호를 사용했다. 그의 시호에 양(煬)이 붙여진 것도 덕치나 인치가 아니고 타오르는 불길처럼 학정을 일삼은 그의 행적을 적절히 빗대 악독한 황제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진시황과 마찬가지로 13살에 왕(진왕 · 晉王)이 된 그는 남조에 속한 진(陳)을 정벌하기도 한 문제의 확실한 창업 동지였다. 그러나 적장자 원칙에 철저한 아버지 문제에 의해 도저히 황태자의 자리를 차지할 수 없었던 그는 결국 형인 용(勇)을 살해하고 권신 양소(楊素)와 음모하여 제위를 차지하게 된다. 물론 제위 찬탈 과정에서 아버지 문제도 살해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정통성 시비를 의식한 양제는 백성들의 마음을 딴 데로 돌리려 무모한 일을 감행하게 된다. 아버지 문제가 닦아놓은 창업의 제국을 수성하는 데 그리 큰 힘이 들지 않았을 것인데 말이다. 그의 대표적인 사업은 항주(杭州)에서 양자강 유역의 양주(揚州)를 거쳐 낙양에 이르는 대운하 토목공사였다. 그 물길은 2000㎞가 넘는 거대한 중국의 대동맥이었다.

그러나 운하건설에는 값비싼 고통의 대가가 동반되었다. 15~55세의 장정 550만 명이 동원되었고 관리하는 감독만 해도 5만 명이나 됐다. 정해진 일감을 채우지 못해 태형 등의 형벌을 받은 자들도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그런 고통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양제는 완성된 운하를 따라 40개 이상의 이궁(離宮)을 지었고 뱃놀이를 즐겼다. 순행을 빙자한 배의 행렬은 200리에 달할 정도였다고 전해진다.

게다가 운하가 완공되자마자 612년 1차 고구려 원정에 113만 8000명의 대군을 동원하여 나섰다가 고구려 명장 을지문덕에게 살수에서 대패하고 만다. 이듬해 2차 원정과 614년의 3차 원정을 모두 실패하면서 걷잡을 수 없는 민심의 동요를 겪었고 결국 자신이 믿었던 신하 우문화급(宇文化及)에게 살해되고 만다.

물난리를 겪는 중국에서 치수의 문제는 오랜 난제였고,대운하 건설이라는 양제의 판단은 적어도 오늘날의 시점에서 보면 어느 정도 유효하다고 보여진다. 그리고 그가 500여개나 되는 율령을 정비하고 많은 제도를 확립해 당 제국의 초석을 다진 것 등도 인정할 만한 업적이다.

그러나 현실을 고려하지 않은 대규모 토목공사와 고구려 원정 등으로 인해서 자신도 살해당하고 수나라 역시 가장 일찍 패망한 국가의 하나로 기록되는 오명을 남기게 되었던 것이다. 양제와 거의 똑같은 방식으로 제위에 오른 당태종은 22년간 당 제국을 이끈 정관지치(貞觀─治)의 대명사요 성군(聖君)으로 기록되었는데,왜 양제는 폭군으로만 기억되는 것일까.

국가든 회사든 최고경영자는 늘 자신의 판단이 틀릴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야 한다. 주변을 돌아보지 않고 무리하게 추진하는 정책이나 개혁,조직원의 동의나 협의를 거치지 않은 성급한 구조조정은 결국 조직의 거대한 반발에 직면하게 되어 돌이킬 수 없는 상황으로 들어서는 것을 우리는 수많은 역사적 사례를 통해 보아왔다. 모든 일에는 시기와 원칙이 있는 법.독불장군은 존재할 수 없다.

김원중 < 건양대 중국언어문화학과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