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초 국내 굴지의 한 대기업 임원이 자살했다는 소식은 해당 기업은 물론 사회 전반에 적지 않은 충격을 줬다. 최고의 엘리트 코스를 밟아 온 그가 업무와 실적 스트레스에 얼마나 시달렸으면 자살까지 했겠느냐는 동정론이 퍼졌다.

자살이라는 극단적 선택은 하지 않았더라도 대기업 임원들이 받는 스트레스는 상당하다. 서울대병원에 따르면 지난해 7월부터 올 6월까지 기업체 단체검진을 받은 대기업 임원 500명 가운데 우울증 진단을 받은 사람은 65명이었다. 검진 임원 중 13%가 우울증을 앓고 있는 셈이다. 물론 우울증의 원인은 대부분 업무 부담 때문이다.

임직원들의 정신건강은 개인과 가족의 문제를 떠나 회사 경영에도 적지 않은 부담으로 작용하는 위험한 단계에 이르렀다는 게 전문가들의 시각이다. 개인의 정신건강이 조직과 기업의 안정성과도 직결된다는 지적이다. 삼성이 올해부터 모든 임원들을 대상으로 매년 스트레스 테스트를 하기로 한 것은 이런 상황 인식을 바탕으로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샐러리맨의 별이지만 그 이면에는

임원은 샐러리맨의 '별'로 통한다. 억대의 연봉에 자동차,널찍한 사무실에 비서까지…. 임원이 되면 일반 직원 때에 비해 프로야구 '메이저 리거'와 '마이너 리거'처럼 천양지차의 신분 변화가 일어난다. 혜택이 많은 만큼 임원이 받는 부담감도 상당하다.

올초 승진해 대기업 임원이 된 최모 상무(47)는 "실적을 내지 못하면 나가야 한다는 압박감에 잠을 이루지 못할 때가 있다"며 "사내 상담실을 가고 싶어도 회사에 소문이 날 것 같단 생각에 선뜻 나서기 어렵다"고 털어놨다. 또 다른 대기업의 이모 상무(52)는 불면증에 시달리다 익명을 보장해준다는 말에 사내 상담실 문을 두드렸다. 그는 2년 전 미국으로 딸 둘을 유학보내면서 '기러기 아빠'가 됐다. 밤 늦은 시간 불꺼진 집으로 퇴근할 때마다 한숨이 나왔다. 요즘 들어선 식욕이 줄더니 밤잠까지 못 이루게 됐다. 회사일도 삐긋거리기 시작했다. 이 상무는 "돈 버는 기계 같단 생각에 삶의 의욕이 떨어지면서 일도 손에 잡히지 않는다"고 말했다.

◆대기업들,임원관리 '건강검진'만

사정이 이렇지만 국내 기업들의 '임원 건강관리 프로그램'은 단순히 건강검진 수준에 그치고 있다. LG그룹이 건강검진에 정신과 상담 여부를 선택할 수 있도록 한 것을 제외하면 임원들의 정신 건강을 체크하는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곳은 전무한 실정이다. GE와 포드 등 외국 기업들이 스트레스 진단,스트레스 해소 교육 등을 포함한 종합 건강증진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회사별로 우울증 등을 상담받을 수 있는 상담실이 있다고 해도 대부분 현장직원들이 밀집한 사업장에 설치돼 있어 임원들은 방문하기가 어렵다.

스트레스 테스트에 대한 대기업 임원들의 우려도 적지 않다. 국내 한 대기업 임원은 "정기 인사를 앞두고 검사를 실시해 검사 결과에 따라 인사고과에 영향을 미치는 게 아니냐는 이야기도 나온다"고 전했다. 또 다른 임원은 "진단 결과 업무 스트레스가 높거나 대인관계에서 스트레스가 많은 것으로 나오면 한직에 배치되거나 '이상한 사람' 취급을 당할까봐 시험 준비하듯 '기출문제'를 찾아보는 사람들도 있다"고 말했다.

김현예 기자 yea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