鄭奎載 <논설위원ㆍ경제교육연구소장 >

독재는 대중의 참여 없이는 불가능하다.

억압과 통제만으로 스탈린과 히틀러와 문화혁명의 마오쩌둥(毛澤東)이 존재할 수는 없다.

자발적 참여는 언제나 광기의 분출을 동반한다.

한 시대가 종료된 다음이라야 전체주의 체제는 비로소 화장을 지운 늙은 작부같은 추한 얼굴을 드러낸다.

낡은 혁명은 선민의식 등 속류 과학주의와 결합되고 역사를 종교화하면서 오도된 밤들을 그렇게 지나왔다.

남북정상회담 이후 쏟아져 나오는 잠꼬대들을 듣고 있노라면 한국의 지성이라는 것이 이토록 무참한 지경이었는지 새삼 놀라게 된다.

'사람이 살고 있었네'류의 말초적 감상문에서부터 북한 동포들의 열렬한 환대를 받았다는 회고담과,아리랑에 박수를 쳤네 안쳤네 하는 고위 당국자들의 객쩍은 농담 짓거리를 들어야 하는 것은 정말이지 고역이다.

그런 수작은 이미 지드와 사르트르의 우스꽝스런 소련 찬양기(記)에서 종을 친 줄 알았더니 이 무슨 헛소리들인지 모르겠다.

조지 오웰이 혁명의 열정을 찬양했던 '카탈로니아 찬가'에서 회색빛 암울한 독재자 '1984년'으로 지적 편력을 걸어갔던 것도 한국의 자칭 문화인들에게는 남의 이야기다.

아리랑에서 체제 선전 부분만 빼면 놀랍도록 웅장한 예술작품이라고 넋두리를 늘어놓는 3류 역사 소설가나 장엄한 서정시(?)라고 앞뒤없이 내뱉는 장관이나 그것으로 관광상품을 만들면 좋은 외화벌이가 될 것이라는 얼치기 좌파들의 주장에 이르면 이들이 지성은커녕 제정신인가 하는 생각을 아니할 수가 없다.

장엄미라는 것 자체가 전체주의 미학의 불가분해한 본질이라는 것을 정녕 모른다는 것인지….그런 수준에서 경제협력을 논하고, 대북투자는 우리 기업에도 대박이 될거라고 우기고, 동반번영의 시대가 올 것이라고 호도하고 있으니 듣는 사람의 얼굴이 무안할 지경이다.

아리랑으로 말하자면 노예들의 군무일 뿐이다.

"북한의 학부형들과 학생들이 아리랑에 참여하는 것을 자랑으로 알고 있더라"는 반론이라면 사이비 종교집단의 어처구니없는 광기를 용인하자는 것에 다름 아니요 히틀러와 스탈린의 추종자라는 비판을 들어 마땅하다.

평양의 창광거리가 모스크바의 레닌스키 대로를 베낀 것처럼 아리랑이라는 것이 스탈린 시절의 집체 무용을 그대로 복사한 것이라는 말 따위는 그들의 귀에는 들어오지도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도대체 무엇 때문에 박정희 시절은 또 그토록 반대했는지 새삼 궁금해진다.

교련수업이며 학도호국단이며 길거리 집단 환영식은 또 그렇게 싫다던 그들이 지금에 와서 아리랑 찬가라니! 결국 그들의 민주화 투쟁이라는 것도 사이비였다는 말인지….노예 노동의 상품화는 이미 19세기에 막을 내린 것인데 지금 무엇의 상품화를 말하는 것인지도 궁금하다.

10만명 출연자에 몇명의 관람객으로부터 과연 얼마의 관람료를 받아야 장기간의 훈련비며 식비며 시설료며 운영비며 임금 따위를 충당할 수 있다는 것인지.도저히 불가능한 역사적 유물이요, 그 자체가 부조리 상황극이다.

그러니 아리랑 상품화 운운은 경제는 물론이고 예술에 대한 이해 수준 또한 미루어 짐작하게 만들기에 충분하다.

이 나라 지성의 수준이 실로 참담하다.

개혁 개방이 왜 필요한지, 경협이 왜 북한 경제의 내부구조와 결합되지 않으면 안 되는지 따위는 설명해도 알 길이 없을 것이다.

어설픈 햇볕이 북한 경제를 더욱 어렵게 만들고 중국 의존만 심화시키며 독재를 온존시키고 결국에는 북한 동포를 더욱 열악한 지경으로 밀어넣는다는 지적은 들으려고도 않는 그들이다.

유신 시절 김지하 시인은 "하늘은 지랄같이 푸르다"고 썼다. 초가을 서리 내리는 첫 새벽에 불려나와 김정일화 따위를 손에 들고 몇 시간씩 동네별로 줄을 서 기다리던 평양의 주민들은 과연 무슨 생각을 곱씹으며 집으로 돌아갔을까.

하늘은 지랄같이 푸르다고 푸념하지나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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