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문을 쓰느라 연구를 못 한다’는 자조적인 말이 만연해 있습니다. 새로 도입될 (교수) 평가 시스템에서는 연구의 양보다는 질이 우선될 것입니다.”

2016년 김용학 연세대 총장이 취임한 직후 연세대 창립 131주년 기념사를 통해 한 말이다. 이후에도 김 총장은 신년사 등 기회가 될 때마다 교수평가 시스템을 정량평가에서 질적 기준을 강화한 정성평가로 바꾸겠다는 의지를 내비쳤다. 이를 바탕으로 연세대는 2017년 9월 이후 승진, 재임용, 정년 심사 등에 질적 평가를 강화하기로 했다.

11일 연세대에 따르면 변화된 평가 방향이 적용되는 교수가 올해 처음 나올 예정이다. 연세대 관계자는 “논문의 양을 중심으로 평가하는 기존의 방식에서 벗어나 논문의 사회적 영향력, 인용정도 등을 다각적으로 반영해 교수 평가를 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 관계자는 “비중은 단과대별로 다르지만 논문 한 편을 쓰더라도 파급력이 큰 논문을 쓴다면 승진이 가능하도록 세부 기준을 조율하는 단계에 있다”고 말했다.
김기현 한양대 건설환경공학과 교수(오른쪽)가 연구원과 함께 대기오염물질과 악취성분 제어에 관한 연구를 하고있다. /한양대 제공
김기현 한양대 건설환경공학과 교수(오른쪽)가 연구원과 함께 대기오염물질과 악취성분 제어에 관한 연구를 하고있다. /한양대 제공
한양대, 외부 인사에게 정성평가 의뢰

대학의 교수 평가 방식이 변화하고 있다. 논문의 질과는 무관하게 논문 수로 교수의 승진·승급 등을 심사하던 전통적인 정량평가 방식에서 벗어나 소수의 논문이라도 사회적 영향력 등 퀄리티(질)를 심사하는 정성평가를 확대하는 추세다. 대학가에선 질적평가 확대 움직임에 대해 “개발도상국 시절 선진국을 따라잡기 위해 논문 수에만 집착한 과거 관행에서 벗어나 실질적인 연구 확대를 위해 꼭 필요한 과정”이라고 평가하면서도 “대학 본부 입맛에 맞지 않는 교수를 솎아내기 위한 수단으로 변질될 수 있다”는 우려가 동시에 나온다.

한양대는 올해부터 교수의 테뉴어 심사(정년보장 임용제도)에 학교 외부인사의 평가를 반영하는 ‘레퍼런스 제도’를 전격 도입했다. 레퍼런스 제도는 논문 수를 평가하지 않고, 심사 대상 교수가 ‘대표업적’으로 내세울 만한 2~3편의 논문이 학계에서 실질적으로 유의미한지를 외부의 시각에서 평가하는 방식이다. 이를 위해 한양대는 해외 유명 학술지의 편집위원, 국내외 다른 대학 교수 등 총 4~5명의 외부인사에게 일정한 대가를 지급하고 평가서를 제출받는다. 한양대는 2015년부터 지난해까지 3년 동안의 시범운영을 거쳐 올해부터 정식 도입했다.

한양대의 레퍼런스 제도는 많은 대학이 테뉴어 심사 과정에서 시행 중인 ‘동료 평가(피어리뷰)’와는 다르다. 동료 평가는 교수의 업적을 평가할 때 외부 교수들이 심사위원의 일부로 참여하는 방식이다. 피평가 교수가 소속된 학과장이 임의로 국내 교수 위주로 평가위원을 선정하다 보니 익명성이 거의 보장되지 않는다는 게 학계의 공통적인 지적이다. 또 외부 평가위원이 교내 평가위원과 함께 참여하기 때문에 독자적 권한이 없는 거수기 역할을 할 수밖에 없었다는 지적이 있었다.

[단독] 연세대·한양대 등 대학가, 교수 승진·승급에 정성평가 확대
반면 레퍼런스 제도는 교내 교수들의 평가와는 독립적으로 외부 인사만의 심사를 통과해야만 테뉴어를 받을 수 있는 방식으로 운영된다. 7~8개의 평가 항목에 따라 세밀한 의견이 첨부되고 4~5명의 독립적인 편집위원 등의 평가가 반영되기 때문에 기존 피어 리뷰보다 심사에 미치는 영향력이 크다는 게 한양대 측 설명이다. 류호경 한양대 교무부처장은 “논문의 양적 팽창은 일류 대학으로 거듭나는 과정에 더 이상 큰 의미가 없다”며 “교수가 학계 및 산업계에 미치는 실질적인 영향력을 공신력 있게 평가하기 위해선 외부 인사에 의한 정성평가가 필수적”이라고 전했다.

레퍼런스 제도는 서울대와 KAIST에서도 비슷하게 운영 중이다. 서울대는 2004년부터 단과대가 자율적으로 외부의 평가를 테뉴어 심사에 반영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KAIST 역시 2007년부터 해외 교수단, 국내 다른 학교 교수단, 교내 교수단 등 3개 집단의 평가를 모두 통과해야만 정년이 보장될 수 있도록 했다.

한국 현실에 부적합하다는 의견도

정성평가를 확대하려는 대학의 움직임에 대해 “민감한 인사 문제에 공정성을 확보할 수 없다”는 우려의 목소리도 나온다. 객관적 지표가 결여돼 있어 대학의 ‘교수 길들이기’로 악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한양대 A교수는 “한국의 대학사회는 학파 사이의 견제가 심하고 교내에서도 능력보다는 연구 태도 등으로 평판이 결정되는 경우가 많다”며 “질적평가를 명분으로 (본부가) 입맛에 맞지 않는 교수의 점수를 일부러 낮게 책정해 학교에서 내쫓는 부작용이 얼마든지 발생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한양대는 지난 3년 동안 시범적으로 레퍼런스 제도를 운용하면서 2명의 교수가 테뉴어 심사에서 탈락할 수도 있다는 본부의 경고를 받았다. 서울대도 최근 레퍼런스 평가로 인해 테뉴어 심사에서 탈락한 교수가 발생한 것으로 알려졌다. 연세대 B교수는 “정량평가로 인해 안정적이고 질 좋은 연구를 할 수 없다는 것은 교수 모두가 공감할 것”이라면서도 “정성평가로 인해 테뉴어에 탈락한 교수가 나오면 과연 모두가 납득할 수 있을지 의문”이라고 전했다. 성균관대는 외부 인사의 평가에 공정성을 담보할 수 없다는 우려에 1999년부터 동료 평가마저 시행하고 있지 않다.

정의진/노유정 기자 justji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