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사의 초기부터 수없이 많은 물품들이 돈으로 사용됐다. 금 은 구리 주석 같은 금속이 많이 쓰였지만 이 외에도 고대 메소포타미아에서는 보리,고대 그리스에선 소,사하라 지역에선 암염,일본에선 쌀,아메리카에선 비버 가죽,2차대전 직후 독일에선 담배가 화폐 역할을 했다.

이런 상품화폐 가운데 가장 오래 전부터,가장 광범위한 지역에서 쓰인 것이 조개화폐다. 조개가 화폐로 쓰인 사례는 중국 인도 아프리카 호주 아메리카 등 거의 모든 대륙에서 찾을 수 있다. 파푸아뉴기니 동쪽의 비스마르크 제도에서는 오늘날에도 부분적으로 조개화폐를 사용하고 있다.

물론 아무 조개나 다 화폐로 쓰이는 것은 아니다. '카우리'라 불리는 조개(개오지)가 가장 널리 쓰였다. 이 조개는 인도 남서쪽의 몰디브 제도에서 많이 생산됐다. 놀라운 점은 이곳에서 나는 카우리 조개가 벵골 지방이나 동남아시아뿐만 아니라 중국과 아프리카에까지 수출됐다는 사실이다. 14세기 기록인 이븐 바투타의 여행기에서 몰디브 제도의 카우리 생산과 아프리카 수출에 대한 이야기를 찾을 수 있다. '몰디브 제도에선 조가비를 화폐로 사용한다. 그곳에선 조가비 100개를 야쓰야흐,700개를 팔,1만2000개를 카티,10만개를 부쓰투라 한다. (…)흑인들도 자기 나라에서는 조가비를 화폐로 쓰는데,말리와 주주에서는 금화 1디나르에 조가비 1150개를 거래하는 것을 보았다. '(이븐 바투타의 《여행기》,정수일 옮김)

사실 중국에서는 이 조개가 아주 먼 고대부터 쓰였다. 고고학자들은 춘추전국시대에 만들어진 드럼 모양의 용기에 카우리 조개가 가득 차 있는 것을 발견했다. 다만 이때 이 조개가 화폐로 쓰였는지는 불명확하다. 부장품이나 의례용품으로 사용한 것으로 보이는데,이 조개의 모습이 여성의 성기와 너무나 닮아 생산과 풍요를 상징했을 것으로 추론한다.

종교적 · 상징적 가치의 상징은 결국 세속적 가치를 나타내는 데도 쓰였을 테지만,정확히 언제부터 이것이 화폐로 쓰였는지는 불명확하다. 원대와 명대에 카우리 화폐가 쓰인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전 시기에 대해서는 기록이 부족하다. 다만 재(財) 화(貨) 대(貸) 무(貿) 매(賣) 매(買) 등 재물과 관련한 많은 한자가 조개패 변을 갖고 있는 것이 조개화폐의 사용과 연관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우리말 보배 역시 어원은 '보패(寶貝)'라 한다.

중국 남부의 윈난(雲南) 지방에서는 17세기까지도 일상생활의 소액 거래에서 카우리가 널리 쓰였다. 몰디브산 카우리가 시암과 버마를 지나는 육로를 통해 이곳으로 들어왔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다 17세기 중엽에 카우리가 퇴출됐다. 이유로는 여러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이 지역 경제가 크게 융성하자 카우리 같은 저급 화폐보다는 더 발전한 화폐가 필요해졌을 것이다.

사실 이 시기에 이르면 카우리의 가치가 너무 떨어져서 실생활에서 사용하기에 불편했던 것 같다. 또 이 시기에 윈난 지역이 중국 문화권에 흡수됐는데,지배의 상징으로서 중국식 화폐 주조를 받아들였다는 점도 고려할 요소다. 몰디브에서 생산한 카우리가 점점 더 아프리카 방면으로 많이 수출돼 윈난 지역으로 들어오기 힘들어졌다는 점도 작용했을 수 있다.

몰디브산 카우리가 아프리카 서해안까지 수출된 것은 일견 놀라운 일이다. 도대체 어떻게 수천㎞를 넘는 그 먼 지역까지 전해졌을까. 아마도 초기에는 아프리카에서 자체 생산한 다른 종류의 조개화폐가 쓰이다 나중에 몰디브산 조개화폐로 대체됐을 것으로 학자들은 추론한다. 몰디브에서 워낙 대량으로 채취한 까닭에 단가가 아주 낮아 그토록 먼 거리를 이동해서도 현지 조개화폐보다 싼 가격에 공급될 수 있었던 것이다. 저가 화폐가 고가 화폐를 밀어내는 일종의 그레셤의 법칙이 작용한 셈이다.

처음 몰디브산 조개를 아프리카에 수출한 사람들은 북아프리카 상인이었지만,아시아의 바다에 유럽 상인들이 들어오면서 수출 규모가 비약적으로 커졌다. 여기에는 아프리카 노예무역도 연결돼 있다. 포르투갈과 네덜란드,영국 상인들은 동남아시아의 카우리 무역이 큰 수익을 내는 것을 보고 여기에까지 손을 댔다.

그들은 큰 배에 바닥짐(ballast)으로 카우리를 실어 본국에 들여왔다가 아프리카로 재수출했다. 마침 노예무역이 대규모로 진행돼 이에 대한 결제수단이 필요했던 것이다. 다음 시기에는 팜오일 무역과도 연결됐다. 이 때문에 20세기 초반까지 계속 카우리가 아프리카에 들어와서 해당 지역의 화폐로 쓰였다.

카우리는 워낙 소액 화폐였기 때문에 같은 금액의 거래에도 금이나 은보다는 훨씬 많은 양이 오갈 수밖에 없었다. 소 한 마리를 사려면 카우리 몇 만개를 주어야 하므로 그것을 세고 운반하는 데 꽤나 힘이 드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이런 점 외에는 원론적으로 조개라고 해서 금이나 은과 다를 바가 하나도 없어 그 지역 경제를 훌륭하게 뒷받침해 주었다.

16세기 이후 세계 경제를 활성화시켰다고 거론되는 은과 비교해 보자.은은 멕시코와 페루에서 대량 생산돼 유럽으로 들어갔다가 그중 일부가 아시아로 송출돼 현지 물품과 교환됐고,해당 지역에 남아 화폐로 사용됐다. 몰디브에서 생산된 카우리는 유럽으로 갔다가 아프리카로 재수출돼 노예나 팜오일과 바꿔졌고 현지 화폐로 쓰였다. 양자 간에 본질적 차이는 전혀 없어 보인다.

고대 중국으로부터 20세기 초 아프리카까지 이 민망한 모양의 조개는 다양한 사회문화 현상과 결합하면서 동시에 세계 화폐의 역할을 훌륭하게 담당했다.

주경철 <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