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정부가 불화수소 등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3대 소재의 대(對)한국 수출 규제와 관련해 한·일 양국 간 성의있는 협의를 하자는 문재인 대통령의 요구를 사실상 거부했다.

세코 히로시게 일본 경제산업상은 9일 국무회의 후 기자회견에서 “(한국에 대한 수출규제 강화 문제는) 협의 대상이 아니다”며 문 대통령 제안에 부정적인 의견을 밝혔다. 세코 경제산업상은 한국에 대한 수출규제 강화와 관련해 “수출관리를 적절히 시행하기 위해 국내 운용을 재검토하는 것”이라고 강변한 뒤 “철회는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한국이 일본의 경제보복과 관련해 세계무역기구(WTO)에 제소할 가능성에 대해선 “(한국에 대한) 우대조치를 중단하고 다른 나라와 동등하게 취급하겠다는 것”이라며 “WTO 규정상 문제될 게 없다”고 주장했다.

스가 요시히데 관방장관도 이날 정례브리핑에서 “(수출규제는) 협의 대상이 아니고 철회도 생각하지 않는다”며 “한국의 수출관리 당국이 이번 수출규제 운용 재검토에 대한 사실 확인을 요구해 사무 차원에서 대응하려 한다”고 거들었다.

일본 정부 각료들의 이 같은 발언은 전날 일본 측의 수출규제 철회와 양국 간 성의있는 협의를 촉구한 문 대통령의 제안을 거부한 것으로 풀이된다. 산케이신문과 요미우리신문 등을 통해서도 일본 정부 고위관계자들은 “문 대통령 발언으로 일본 정부 대응이 달라질 것은 없다”거나 “한국이 신뢰를 얻을 수 있는 행동을 하길 바란다”는 등의 부정적인 언급을 했다.

일본 정치권도 문 대통령의 제안을 폄하하는 분위기다. 자민당 중진 의원인 아마리 아키라 전 경제재생담당상은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자신의 말만 들어달라고 해서는 국제적인 신뢰 관계가 성립될 수 없다”며 “(문 대통령이) 좀 더 어른스럽게 되는 쪽이 좋을 것”이라고 했다.

일본 정치권의 강경자세와 달리 경제계에선 급격히 냉각된 한·일 관계에 대해 우려의 목소리도 늘고 있다. 일본 최대 경제단체 게이단렌의 구보타 마사카즈 사무총장은 전날 기자회견에서 “한·일 관계가 정치적으로 매우 어려운 상황에 처한 것을 깊이 우려한다”고 말했다. 구보타 사무총장은 오는 11월 한국 전국경제인연합회와의 정기 회의를 예정대로 열 계획이라고 덧붙였다. 전경련과 게이단렌은 1983년 이후 연례 회의를 열고 있다.

구보타 사무총장은 하지만 “국제법에 입각해 관계 개선을 도모할 수 있도록 특히 한국 정부에 (태도 변화를) 기대한다”며 책임을 한국 측에 떠넘기는 모습을 보였다.

요미우리신문은 한·일 정부 관계자들이 이르면 이번주에 도쿄에서 수출규제 관련 당국자 간 첫 번째 협의를 할 예정이라고 보도했다. 일본 측은 이 자리를 한국에 대한 금수조치가 아니라 실무 차원의 ‘설명회’로 삼을 계획인 것으로 알려졌다.

도쿄=김동욱 특파원 kimdw@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