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헬스케어는 왜 '규제 무덤' 됐을까
“육성은 진흥기관이 통상적으로 쓰는 단어이므로 오해가 없도록 표현을 순화하는 게 좋겠다.”

작년 12월 19일 보건의료연구원 이사회에 참석한 A이사의 발언이다. 중장기 경영목표에 담긴 12대 전략과제 중 하나인 ‘디지털 헬스케어 육성 지원’에 대한 지적이었다. 보건의료연구원의 소임은 ‘산업 육성’이 아닌데 왜 육성이라는 표현을 썼냐는 것이다. 의료계 인사로 구성된 다른 사외이사들도 거들고 나섰다. 결국 ‘디지털 헬스케어 육성 지원’ 과제는 ‘육성’이 ‘실증’이라는 단어로 바뀌고서야 이사회를 통과했다.

건보에 발목 잡힌 신기술

보건의료연구원의 핵심 업무는 의료기술평가다. 디지털 헬스케어 서비스, 의료기기, 체외진단 분야 헬스케어 신기술의 시장 진입 ‘관문’ 역할을 하는 곳이다. 이곳을 통과하지 못하면 제아무리 해외에서 혁신 제품으로 인정받더라도 국내 시장에 발붙이기 어렵다. 식품의약품안전처로부터 판매 허가를 받았더라도 소용없다. 한국 특유의 의료보험 제도 때문이다.

모든 국민이 동일한 의료보험 혜택을 받는 나라는 전 세계에서 한국이 거의 유일하다. 뛰어난 의료 서비스를 값싸게 받을 수 있는 배경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건강보험제도가 신기술의 시장 진출을 어렵게 하는 장벽이다. 건강보험 수가가 정해지지 않은 의료기기, 헬스케어 서비스는 병원에서 거의 쓰지 않기 때문이다.

논란의 핵심은 국가건강보험 시장 진입을 판가름하는 의료기술평가다. 식약처의 판매 허가 잣대와 다르다는 게 문제다. 식약처는 의료기기의 안전성을 주로 평가한다. 반면 의료기술평가는 해당 의료기술의 비용 대비 효과를 따진다. 보험수가를 쳐줄 만한지 평가하는 것이다. 의료 현장 실증시험도 요구한다. 이 때문에 식약처 허가를 받았더라도 임상 데이터를 또 쌓아야 한다. 이렇다 보니 제품 개발을 해놓고도 4, 5년 넘게 허송세월하는 헬스케어 기업이 수두룩하다.

고질적인 의료계 '편견'

헬스케어업계가 답답해하는 것은 의료인 등으로 구성된 심사위원들의 경직된 시각이다. 의료 현장에서 효과가 확인될 때까지 신기술이 설 기회를 좀처럼 주지 않는다. 원격 실시간 모니터링, 질병 조기진단 등 헬스케어 신기술을 도입해 의료비 부담을 낮춘 사례가 미국 영국 등에서 보고되고 있는데도 말이다. 지난달 보건의료연구원 이사회가 이런 현실을 보여준 단적인 현장이었다. 신기술을 발굴하고 육성해 질병을 사전에 예방하고 이를 통해 건강보험 지출을 줄이려는 노력은 등한시한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헬스케어업계의 숙원이던 원격의료가 사실상 풀렸다. 제도적 기반 마련까지는 가야 할 길이 멀지만 이젠 되돌릴 수 없는 대세가 됐다. 만성질환을 모니터링하는 시범사업도 한창이다. 병원에 쌓인 의료 데이터도 윤리위원회를 거치면 활용할 길이 열려 있다. 그런데도 헬스케어업계에선 여전히 규제투성이라고 불만이 나온다. 의료기술평가 같은 규제 아닌 규제가 널려 있기 때문이다. 이렇다 보니 조항 몇 개 고치는 걸로 해법을 기대하긴 어렵다. 건강보험제도 같은 시스템을 손봐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는 배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