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부

긴 상이 있다
한 아름에 잡히지 않아 같이 들어야 한다.
좁은 문이 나타나면
한 사람은 등을 앞으로 하고 걸어야 한다
뒤로 걷는 사람은 앞으로 걷는 사람을 읽으며
걸음을 옮겨야 한다
잠시 허리를 펴거나 굽힐 때
서로 높이를 조절해야 한다
다 온 것 같다고
먼저 탕 하고 상을 내려놓아서도 안 된다
걸음의 속도도 맞추어야 한다
한 발
또 한 발


*함민복 : 1962년 충북 충주 출생. 1988년 ‘세계의 문학’으로 등단. 시집 『우울 씨의 일일』,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 『말랑말랑한 힘』, 『눈물을 자르는 눈꺼풀처럼』 등 출간. 김수영문학상, 박용래문학상, 윤동주문학대상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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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두현의 아침 시편] 부부의날, 보폭을 맞추며 발을 씻어 주며…
10여 년 전 늦장가를 간 ‘강화도 시인’ 함민복 씨가 마흔 살 노총각 시절에 쓴 시입니다. 장가가는 후배를 위해 썼다는데, 노총각이 이런 이치를 어떻게 다 알고 있었을까요.

‘한 아름에 잡히지 않아 같이 들어야’ 하고, 서로의 높낮이뿐만 아니라 걸음의 속도까지 맞춰야 하는 ‘긴 상(床)’. 함께 발을 맞추고 보폭을 조절하는 그 과정에 평생 반려의 지혜가 다 응축돼 있습니다.

그의 결혼식도 그랬죠. 동갑내기 아내와 나이를 합치면 100살이고 신랑 신부의 성을 따면 ‘함박’이라고 해서 더욱 화제를 모았습니다. 그는 쉰이 돼서야 단짝을 만났죠. 반세기를 돌고 만난 인연이라 더욱 애틋했습니다. 시를 배우고 싶어 왔다는 ‘문학소녀’와 함께 있으면 그럴 수 없이 편안했다고 해요. 마음이 맞고, 고향도 같고, 성장 과정도 비슷했으니 더 그랬을 겁니다.

걸음의 속도까지 서로 맞춰야

서른 중반부터 강화 동막해변의 월세 10만원짜리 방에서 바다와 갯벌의 생명력으로 자신을 단련하고, 생활비가 떨어지면 방 가운데 빨랫줄에 걸린 시 한 편 떼어 출판사로 보내던 그가 ‘꽃보다 아름다운’ 신부를 만나 ‘세상에서 보기 드문 착한 부부’로 거듭나던 날.

‘시 한 편에 삼만원이면/ 너무 박하다 싶다가도/ 쌀이 두 말인데 생각하면/ 금방 마음이 따뜻한 밥이 되네’라던 그에게 어머니 품처럼 둥글고 아름다운 밥상이 새로 생겼죠.

“신랑 신부 나이 합쳐 100살”이라며 짓궂게 놀린 사람은 주례를 맡은 소설가 김훈이었습니다. 가수 안치환은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의 가사를 바꿔 ‘지독한 외로움에 쩔쩔매본 민복이는 알게 되지~’라는 축가로 좌중을 웃겼죠.

그렇게 외로움에 쩔쩔매던 사람이 “남편과 아내라는 두 개의 심장으로 살아가는 느낌이 좋다”며 강화도에 인삼가게를 열어 알콩달콩 잘 살아가고 있습니다.

당신, 바다가 섬의 발을 씻어 주듯

서로 다른 환경에서 자란 남녀가 일생을 함께 사는 일이 쉬운 것만은 아니지요. 남녀의 언어습관과 사고방식, 공간지능은 다릅니다. 그래서 심리학자들은 “주관적인 부부 문제를 객관적인 남녀 문제로 바꿔 보면 해답이 보인다”고 조언하지요. 영국 역사학자 토머스 풀러가 “결혼 전엔 눈을 크게 뜨고 결혼 후엔 반쯤 감으라”라고 말한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내일은 부부의 날. 서로 눈을 반쯤 감아주는 배려와 함께 지나온 길의 여독을 풀어주는 사랑의 손길이 절실한 날이지요. 시 한 편을 읽어주는 것도 큰 힘이 됩니다. 함민복의 ‘부부’에 이어 조명 시인의 시 ‘세족’을 함께 음미하면 더욱 좋을 듯합니다.

바다가 섬의 발을 씻어 준다
돌발톱 밑
무좀 든 발가락 사이사이
불 꺼진 등대까지 씻어 준다
잘 살았다고
당신 있어 살았다고
지상의 마지막 부부처럼
섬이 바다의 발을 씻어 준다.

오늘 소개한 ‘세족’은 해마다 부부의 날에 가장 사랑받는 시이기도 합니다. 짧지만 긴 여운을 품고 있지요. 그 행간으로 서로 발을 씻어 주는 부부의 뒷모습이 은은하게 흐릅니다.

금실 좋은 부부는 말투와 걸음걸이, 표정까지 닮는다고 하지요. 톨스토이가 ‘행복한 가정은 모두 비슷한 이유로 행복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제각각의 이유로 불행하다’고 했듯이, 행복한 부부는 모두 ‘사랑·배려·헌신’이라는 덕목을 공통으로 지니고 있답니다.

■ 고두현 시인·한국경제 논설위원 : 199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늦게 온 소포』, 『물미해안에서 보내는 편지』, 『달의 뒷면을 보다』 등 출간. 시와시학 젊은시인상 등 수상.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