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 칼럼] 독일의 재무장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첫 주말인 지난달 27일, 독일 베를린에서 50만 명이 반전(反戰) 시위를 벌였다. 예상 밖 인파에 모두가 놀랐다. “푸틴에 맞서 우크라이나를 도와야 한다”는 여론이 빗발쳤다. 올라프 숄츠 총리가 “헬멧 5000개를 보내겠다”고 하자 독일 국민은 “고작 헬멧이냐”며 야유를 보냈다.

숄츠는 결국 대전차 무기 1000기, 지대공 미사일 ‘스팅어’ 500기 등 군사장비 지원을 결정했다. 2차 세계대전 전범국가인 독일이 ‘전쟁 중인 나라로 인명살상용 장비를 보내지 않는다’는 원칙을 최초로 깬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숄츠는 내친김에 국방비를 당장 1000억유로(약 136조원) 늘리고, 국내총생산(GDP)의 2% 이상을 매년 국방 예산에 투입한다고 발표했다.

어제는 미국산 최신형 스텔스 전투기 F-35를 35기 구매한다는 계획을 밝혔다. 대공 방어용 유로파이터 15기도 사들인다고 했다. 인구 8000만 명의 독일은 GDP 규모가 미국 중국 일본에 이어 4위지만 방위비는 영국 프랑스에 못 미친다. 병력도 예비군 포함 21만 명으로 터키의 3분의 1 수준에 불과하다. 이런 상황에서 독일이 재무장에 나서자 해외 언론은 “전후 독일 외교정책에서 볼 수 없는 가장 큰 변화”라고 대서특필했다.

영국 BBC는 ‘푸틴의 전쟁이 독일의 극적 유턴을 자극했다’는 제목의 기사에서 “독일인이 갑자기 우크라이나가 베를린에서 매우 가깝다고 느끼기 시작했다”며 “이들의 위기감이 대(對)러시아 강경책과 재무장을 초래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 같은 변화는 유럽의 지정학적 숙명인 ‘독일 딜레마’를 다시 떠올리게 한다. 역사상 유럽의 세력 균형은 독일이 너무 커지거나 분열할 때마다 무너졌다. 전문가들은 이번 전쟁과 이로 인한 독일의 재무장이 장기적으로는 독일 세력권과 러시아 세력권의 충돌로 비화할 가능성을 우려하고 있다.

더 큰 문제는 이번 사태를 계기로 다른 나라들도 군비 경쟁에 본격적으로 나설 것이라는 점이다. ‘중화 패권’을 꿈꾸는 중국은 물론이고, 또 하나의 전범국인 일본까지 여기에 동참할 수 있다. 이들 국가가 저마다 첨단무기를 늘리고 목소리를 높이면 국제 정세가 요동칠 수밖에 없다. 동맹 강화와 안보 자립의 중요성뿐만 아니라 ‘평화는 힘이 있어야 지킬 수 있다’는 교훈을 새삼 되새기게 된다.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