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정부의 탈(脫)원전 정책 선봉장이던 한국수력원자력이 정권 말기에 기존 입장을 180도 바꾼 ‘원전 옹호 보고서’를 연이어 내놓고 있다. 작년 말 환경부에 ‘원전=친환경’ 의견서를 보낸 데 이어, 지난 4일에는 원전 안전성을 조목조목 짚은 답변서를 국민의힘 김도읍 의원 측에 제출했다. 한때 사명에서 ‘원자력’을 빼는 것까지 검토했을 만큼 탈원전 전위대 노릇을 한 데 대한 뒤늦은 고해성사로 볼 수도 있지만, 다음 정부에서 직무유기나 배임 혐의를 피하려는 ‘알리바이용’ 이라는 의구심을 갖게 한다.

한수원이 김 의원에게 제출한 8쪽짜리 문서는 문 대통령이 2017년 6월 고리원전 1호기 영구정지 선포식 때 원전 위험성을 내세워 탈원전 당위론을 편 것을 정면 반박하고 있다. 한수원은 답변서에서 40년 넘게 한 차례도 사고가 없었을뿐더러 △최대 지진력에 안전 여유까지 더한 내진설계 △일본 후쿠시마 원전과는 다른 가압경수로형 설계 △2050 탄소중립을 위해선 원전이 필수라는 점 등을 강조했다. 어느 것 하나 뺄 것 없이 모두 맞는 말이다. 문제는 원전 운영기관인 한수원이 5년 내내 잠자코 있다가 왜 이제 와서야 ‘입바른 소리’를 하느냐는 것이다.

한수원의 정재훈 사장은 탈원전에 반대하다가 임기를 절반 이상 남겨두고 물러난 이관섭 전 사장의 후임자다. 그는 월성 원전 1호기 경제성 조작에 관여한 혐의로 백운규 전 산업통상자원부 장관, 채희봉 전 청와대 비서관과 함께 직권남용 및 업무방해 혐의로 기소됐다. 정 사장에겐 배임 혐의도 추가됐다. 검찰은 정 사장이 월성 1호기 조기 가동중단으로 회사에 1481억원의 손실을 입혔다고 적시하고 있다. 그러나 현 정부 들어 폐쇄·백지화된 원전 7기로 한수원이 입은 손실액은 그 10배인 최소 1조4455억원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정 사장은 공기업 사장이 정부 지시나 정책 기조를 거스르기 어렵다고 억울함을 호소할 것이다. 그러나 박근혜 정부 시절에도 국정농단에 연루됐던 공무원들은 재판과정에서 상부 지시에 따랐을 뿐이라는 소명이 통하지 않고 대부분 유죄를 선고받았다. 한수원이 정권 말기에 입장을 급선회한 것이 국민에게는 재판을 염두에 둔 꼼수로밖에 비치지 않을 것이다. 그보다는 지난 5년간 탈원전 정책이 잘못된 것을 알고도 적극 동조한 데 대해 국민에게 사과부터 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