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 칼럼] 용두사미 된 신남방정책
이명박 정부가 ‘녹색성장’을 내건 2009년, 온 나라는 ‘녹색바람’ 일색이었다. 대통령 직속 녹색성장위원회 신설을 필두로 중앙부처와 지방행정기관마다 녹색성장책임관들이 속속 임명됐고, 지자체별로 지방녹색성장위원회가 꾸려졌다. 교토의정서 후속 기후체제에 대한 국제사회 논의가 본격화하던 때여서 녹색성장 아젠다 설정은 적절했다.

하지만 녹색기후기금 사무국 유치를 빼곤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했다. 오히려 화석연료 중심의 해외자원 개발에 31조원을 투입했다고 거센 비판을 받았다. 지난 정부들의 국가 아젠다는 이처럼 ‘시작은 창대, 끝은 미약’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국가균형발전, 창조경제, 정보화, 행정혁신과 규제개혁 등이 모두 그랬다. 정권 초기 정책추진체계만 열심히 그리다가, 점차 대통령의 관심이 줄어들면 흐지부지되는 식이었다.

문재인 정부의 ‘신남방(아세안 10개국+인도)정책’이 그런 전철을 밟고 있다. 아세안 인구만 6억5000만 명, 한국의 45배에 이르는 면적과 풍부한 천연자원, 연평균 5%의 고속성장을 한다는 점이 한국 경제의 새로운 성장 발판으로 삼기에 모자람이 없다. 그래서 의욕적으로 추진한 신남방정책이 4년을 맞았으나, 오히려 성과는 점점 하락세다.

전경련에 따르면 아세안 10개국 수입시장에서 지난 4년간 중국(20.0%→22.4%)과 대만(5.4%→5.6%)의 점유율은 상승한 반면, 한국은 되레 하락(7.7%→6.9%)했다. 또 베트남을 제외한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등 5개국과의 교역액이 2018년을 정점으로 줄고 있다. 중국은 물론 일본까지 경제외교 역량을 이 지역에 집중하는데, 한국은 힘을 싣지 못한 결과다. 문 대통령이 “미래는 아시아 시대”라고 강조했지만, 결국 말의 성찬에 그친 셈이다.

과거 국가 아젠다 가운데 거의 유일한 성공작은 노태우 정부의 ‘북방정책’이다. 소련·중국 등 공산권과 외교관계를 수립해 한국 외교 지평을 넓혔고, 한반도 긴장 완화에 주춧돌을 놓았다. 공산권 붕괴라는 세계사적 흐름에 발맞춰 ‘구호’가 아닌 ‘실질’로 접근했고, 정권이 바뀌어도 국익 차원에서 계승하는 대승적 정치가 큰 역할을 했다. 이런 모범을 따라야지, 신남방정책처럼 상대국이 있는 국가 아젠다를 용두사미 꼴로 만들어선 곤란하다. 한 번 신뢰를 잃으면 다시 추진하기 어려운 게 대외정책이다.

장규호 논설위원 danielc@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