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병석 칼럼] 이주열 한은 총재를 위한 변명
요즘처럼 한국은행이 ‘동네북’이었던 적도 드물다. 정치인과 정부 관료들은 한은 얘기만 나오면 불만을 터트린다. “미증유 위기인데도 이주열 총재가 너무 몸을 사린다.” “조직 이기주의에 빠져 금융시장 안정에 미온적이다.” 이동걸 산업은행 회장은 “한은의 문제의식이 안일하다”고 공개 비판했다. 일부 언론도 “미국 중앙은행(Fed)은 달러 바주카포를 쏘는데, 한은은 소총만 쏜다”고 거든다.

‘코로나 사태’로 인한 경제위기에 너도나도 통 크게 돈을 풀자고 난리인데 정작 돈을 찍어내는 중앙은행인 한은이 신중하다 보니 십자포화를 맞고 있다. 한은은 지난달 기준금리를 연 0.75%로 0.5%포인트 내리고, 환매조건부채권(RP) 매입을 통해 ‘한국판 양적완화’를 하겠다고 선언하긴 했다. 하지만 이것도 정부와 정치권의 빗발치는 요구에 수동적으로 응한 모양새로 비쳤다.

그렇다면 한은은 비난받아 마땅한가. 이쯤에서 한은에 대한 공격이 타당한지 짚어보자. 한은을 비판할 때 주로 하는 말이 ‘Fed는 하는데, 왜 한은은 안 하느냐’다. 이 말의 맹점은 달러와 원화의 차이를 간과하고 있다는 것이다.

기축통화인 달러는 세계 어디서나 통용된다. 수요가 거의 무한대다. Fed가 아무리 돈을 찍어도 달러가치에 큰 변동이 없는 이유다. 그러나 원화는 다르다. 한국에서만 쓰인다. 마구 찍으면 돈값이 떨어져 원·달러 환율이 뛴다. 환율 상승은 한국에 투자한 외국인들의 이탈을 부추길 수 있다. 원화값이 추락하면 언제든지 빠져나갈 수 있는 국내 증시의 외국인 투자자금은 450조원을 넘는다. 유가증권시장 전체 시가총액(약 1200조원)의 38%, 외환보유액 4002억달러(약 480조원)의 94%에 달한다. 이게 썰물처럼 빠져나가면 외환위기가 오지 말란 법이 없다.

한은이 찍는 돈은 공짜도 아니다. 시중에 돈을 풀면 기업 등 생산부문뿐 아니라 투기부문으로도 흘러가 자산 인플레를 유발한다. 인플레는 경제 전반에 피해를 끼친다. 모두 국민이 내야 하는 비용이다.

한은이 얻어맞는 또 하나의 이유는 회사채를 직접 매입하지 않고 있어서다. 정치권은 마비 직전인 채권시장을 살리기 위해 한은이 어려운 기업의 회사채를 사줘야 한다고 압박한다. 하지만 한은이 회사채를 사는 건 한국은행법상 불가능하게 돼 있다. 한은이 회사채를 사주면 특정 기업을 발권력으로 지원하는 꼴이 돼서다. 이는 형평성 문제를 야기하고, 도덕적 해이를 부추길 수 있다.

정부의 정책 실패를 덮는 데 악용될 소지도 있다. 두산중공업의 자금 사정이 어렵다고 한은이 이 회사가 발행한 채권을 사준다고 치자. 탈원전 정책으로 생긴 적자를 한은이 돈을 찍어 메워주는 셈이 된다. 부실기업에 대한 직접 지원은 한은이 아니라 산은이나 정부가 하는 게 정공법이다. 국민의 대의기관인 국회 동의를 받아 투명하게 공적자금을 집행하면 된다. 다소 시간이 걸리더라도 국민 세금을 쓰는 일이니 그래야 한다. 이걸 한은에 떠넘기는 것이야말로 정부의 책임 회피다.

한은 보고 팔짱만 끼고 있으란 말은 아니다. 물가안정과 함께 금융안정도 중앙은행의 핵심 책무다. 한은은 금융위기 때 최종 대부자(lender of last resort)로서 시장에 자금을 공급할 의무가 있다. 다만 그 방식은 한은법을 따라야 한다. 지금 한은이 RP 매입을 통해 한국판 양적완화를 실행(한은법 제68조)하고, 은행뿐 아니라 증권사에도 돈을 빌려주겠다(제80조)고 한 것은 모두 법이 허용한 범위 안에 있다. 그 이상의 초법적 돈풀기를 요구해선 안 된다.

정치권 압력이 얼마나 셌으면 한은 내부에서조차 “이렇게 욕만 먹느니 차라리 시키는 대로 하자”는 얘기가 나온다고 한다. 그러나 코로나 위기에 놀라 정부와 정치권이 무턱대고 돈풀기에 나설 때 누군가는 중심을 잡고, 완급을 조절해줘야 한다. 위기 이후 닥칠지 모를 거품 등 부작용을 최소화하기 위해 그렇다. 바로 그런 역할을 해야 하는 게 중앙은행이다. 총재 임기를 법으로 보장하는 등 정치권과 정부로부터 한은의 독립성을 확립한 이유도 거기에 있다. 한은은 두들겨 맞더라도 원칙대로 하는 게 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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