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 칼럼] 국책연구기관의 신뢰
한국이 ‘세계 10위권 경제대국’으로 올라서기까지 국책연구기관들의 공로를 빼놓을 수 없다. 이승만 초대 대통령은 원자력의 가치를 알아보고 1959년 첫 국책연구기관인 원자력연구소를 세웠다. 김일성이 1962년 영변에 원자력연구소를 완공한 것보다 3년 빨랐다. 박정희 대통령은 1977년 고리 1호기를 준공하며 ‘원자력 강국’의 기틀을 닦았다.

세계 최빈국 수준이던 나라에 세계적 기업이 즐비하게 된 데는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의 역할이 컸다. 1965년 박정희 대통령을 초청한 린든 존슨 미국 대통령은 과학기술에 대한 박 대통령의 애착을 전해 듣고 공과대학 설립을 제안했다. 그러자 박 대통령이 ‘공업기술연구소’ 설립을 도와줄 것을 요청했고 KIST가 탄생했다. KIST는 전자 중화학 철강 등 한국 제조 기반의 산실이 됐다.

경제 부문에서는 한국개발연구원(KDI)이 선두주자다. 1971년 출범 때 37세이던 김만제 교수가 초대 원장을 맡아 화제를 모았다. 박정희 대통령이 “김 교수가 한국경제신문(당시 현대경제일보)에 쓴 칼럼이 인상 깊던데, 그를 원장으로 하면 어떤가”라며 직접 낙점한 일화가 전해진다. KDI는 고비마다 크게 활약했다. 경제기획원 강경식 차관보 등과 힘을 합쳐 안정화 정책을 1978년부터 시작한 역사는 두고두고 회자된다. 과잉 투자로 몸살을 앓던 경제는 비로소 체질을 탈바꿈해 전두환 대통령 때 ‘단군 이래 최대 호황’을 누렸다.

‘ICT 강국 대한민국’에도 1976년 설립된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이 자리하고 있다. ETRI는 1996년 부호분할다중접속(CDMA) 통신기술을 세계 최초로 상용화하며 ‘휴대폰 신화’의 초석을 마련했다. 1986년 삼성반도체통신, 금성반도체, 현대전자 등과 시작한 프로젝트로 한국 메모리 반도체를 세계 1위로 견인해 냈다.

역사의 고비마다 역할을 해냈지만, 위상은 갈수록 쪼그라들고 있다. ETRI는 민간에 정보통신기술(ICT) 개발 주도권을 내주며 정부 산하 용역기관 정도로 인식되고 있다. ‘탈(脫)원전’ 바람에 한국원자력연구원의 분위기 역시 썰렁하다.

한국의 ‘대표 싱크탱크’ KDI 위상도 예전같지 않다. KDI는 2016년 4분기 성장률을 마이너스로 전망했다. 하지만 이듬해 초 발표된 실제 성장률은 0.4%로 확인되면서 비난에 시달렸다. 최근 KDI는 ‘고용 쇼크’에 최저임금의 영향을 배제할 수 없다며 정부에 각을 세우는 모습이다.

요즘엔 1988년 출범한 노동연구원이 주목받는 국책연구기관으로 떠올랐다. 장하성 청와대 정책실장이 고용낙관론을 고수했던 배경에 노동연구원이 있으며, 엊그제 발표된 고용통계로 허를 찔렸다는 말도 나온다. 국책연구소마저 바람을 타야 하는 것인지, 지켜보고 있기가 조마조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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