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칼럼] 자유를 뺀 민주는 노예의 길
좌파는 자유가 주는 혜택을 누리면서도 자유라는 말의 사용을 무척 싫어한다. 새 중·고교 역사교과서에는 ‘자유민주’에서 자유를 빼고 ‘민주’만을 사용토록 하겠다거나, 좌파 정권의 헌법개정안과 현행 경제정책에도 자유라는 말이 사라진 건 그래서다.

주목할 건 자유를 뺀 민주가 우리를 어디로 이끌어 가는가의 문제다. 민주의 적(敵)은 권위주의이고 자유의 적은 전체주의다. 우선 자유와 민주를 뺀 체제를 보자. 이는 옛 소련 사회주의, 중국 마오쩌둥의 문화혁명, 북한의 인민민주주의 등 수억의 인구를 죽음으로 이끈 권위적 전체주의 체제(이념좌표Ⅳ)다. ‘위헌정당’이라는 이유로 강제 해산된 통진당의 진보적 민주도 한통속이다.

자유를 뺀 민주의 좌파적 개념도 심각하다. 좌파에게 민주는 그 자체가 목적이다. 그래서 다수의 결정이 진리요 정의라고 믿는다. 분배평등의 의미로 이용하는 것도 좌파의 민주 개념이다. 정부 역할에 제한이 없다는 점에서 좌파의 민주는 무제한이다. 정치가 경제를 광범위하게 지배한다. 정부의 손이 뻗치지 않는 독립적인 민간 영역이 거의 없다(이념좌표Ⅲ).

좌익의 민주 개념이 얼마나 치명적인가는 베네수엘라 경제를 초토화한 민주집중제, 민주적 절차로부터 생겨난 나치즘, 유럽 경제의 환자로 만든 이탈리아 사회주의가 말해준다. 시민을 노예로 만드는 게 민주적 전체주의다. 토지공개념, 사회적 기업 등 재산권과 자유를 유린하는 최근 한국 좌파의 개헌안도 한통속이다.

[다산 칼럼] 자유를 뺀 민주는 노예의 길
노조,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을 비롯한 각종 좌익집단과 연합해 매일 쏟아내는 정부의 친(親)노동·반(反)기업 정책, 예를 들면 최저임금 인상, 노동시간 단축 등을 통한 소득주도 성장, 대기업을 혐오하는 경제민주화처럼 최악의 실업, 분배 악화, 소득 감소를 초래한 사회주의 정책, 그리고 프랑스 혁명과 동일시하는 촛불정신도 노예의 길이다. 아동수당, 공무원 17만 명 채용 등 세금으로 못할 일이 없다는 사회주의 믿음도 한통속이다.

그러나 재산권과 자유를 말하지 않고는 야만적 삶에서 인류를 문명화된 사회로 이끈 것도, 한국 경제가 번영을 거듭해 빈곤을 극복하고 경제적 위상이 세계 10위권으로 격상된 것도 설명할 수 없다. 자유를 뺀 한국사 이해는 굶주림으로 허덕이는 북한 체제를 예찬하고 번영하는 대한민국을 부정하지 않을 수 없는 모순된 역사 인식을 초래한다.

시장의 자유는 언론, 사상, 집회 등 시민적 자유와 민주 발전의 선결 조건이라는 점도 주지할 필요가 있다. 미국 싱크탱크 프리덤하우스가 보여주고 있듯이 한국에서 미국 독일 등 어떤 사회에 못지않게 민주제도가 발전한 건 경제적 자유 덕택이다. 이런 역사적 사실을 감안한다면 부의 생산을 통제하는 ‘촛불사회주의’가 경제·정치·문화적 삶 등 개인의 모든 삶을 통제하는 전체주의가 되는 건 확실하다.

우리 사회에는 한때 재산권과 경제적 자유를 누리면서도 민주가 굴절된 권위적 자본주의(이념좌표 Ⅱ)시대가 있었다. 정치적 자유를 누리지 못하지만 경제적 자유가 가장 큰 나라는 오늘날 세계 최고의 번영을 누리는 홍콩(자유·권위조합 E)과 싱가포르(F)다. 경제적 자유가 제한적이나마 허용됐던 일당독재의 중국 덩샤오핑(G)시대도 권위주의다.

자유주의에 민주는 목표가 아니라 기능적인 것, 즉 수단이라는 걸 직시해야 한다. 자유민주에서 민주가 의미가 있으려면 그건 자유에 적합한 민주여야 한다. 이런 민주는 사적 영역을 넓히고 다수에 의해 결정할 공적 영역을 제한하는 민주다. 다수의 권력을 제한하지 않으면 자유를 억압하는 전체주의 함정에 빠질 위험이 있다. 헌법적으로 ‘제한된 민주’를 요구하는 것이 자유민주다(이념좌표Ⅰ). 얼마만큼 공공 영역을 헌법적으로 제한하고 시장 영역을 확대하느냐에 따라 미국(자유·민주조합 A) 영국(B) 독일(C) 한국(D) 등 나라마다 경제 체제가 상이하다.

결론적으로 자유를 뺀 민주는 스스로를 파괴하는 노예의 길이다. 번영의 참된 역사 인식도 방해할 뿐이다. 자유와 재산권을 지키는 데 그 역할이 제한된 민주만이 한국 사회가 지향할 민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