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칼럼] 나라를 생각하며 조금 냉정해지자
온 나라가 흔들리고 있다. 처음 미르재단과 K스포츠재단의 설립과정에서 발단한 의혹이 눈덩이처럼 커져 급기야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하는 대규모 촛불집회에까지 이르렀다. 대통령에 대한 지지도가 10%대로 떨어졌으니까 대선에서 지지했던 사람들 가운데도 30% 넘게 지지를 철회했다. 경제는 온갖 위기징후를 보이고 북핵 문제도 엄중한데 이러다 나라가 제풀에 쓰러지는 것은 아닌가는 생각마저 드는 상황이다. 그래서 맞아 죽을 각오로 “모두 조금은 냉정을 회복하자”고 외친다.

전국 곳곳에서 벌어진 대규모 촛불 시위를 보는 내 눈에는 이명박 정부 초기 벌어진 광우병 사태가 겹쳐 보였다. 그때도 확인되지 않은 괴담 수준의 의혹이 이성적인 판단보다는 광기에 가까운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연일 격렬한 시위가 이어졌다. 한 여자 탤런트는 미국산 소고기를 먹느니 차라리 당장 청산가리를 마시고 죽겠다고도 했다. 하지만 태산이 소리나게 흔들릴 정도로 소란을 떨었는데 쥐 한 마리도 나오지 않았다. 이후 우리 국민의 미국산 소고기 소비는 두 배나 늘었다. 그때 그 탤런트는 그 후 미국산 소고기 한 점도 먹지 않았을까. 사실로 확인된 의혹은 없었지만 광우병 사태로 이명박 정부의 리더십은 치명상을 입었다. 결과적으로 나라 전체가 큰 피해를 입었다.

그때처럼 지금도 지나치게 흥분해 사실관계를 확인도 하지 않고 있는 것은 아닌가. 미르재단과 K스포츠재단의 설립 속도와 자금 조성은 확실히 상식적으로 납득이 되지 않는다. 당연히 권력을 빙자했다는 합리적 의심이 가능하다. 문제는 권력 농단 부분이다. 지금 하야니 탄핵을 운위하는 것은 국정 농단의 의혹이 모두 사실이라는 전제에 서 있다. 하지만 제기된 의혹은 많지만 확인된 것은 거의 없지 않은가. 대통령도 인정했듯이 취임 초기에 연설문 등과 관련해 의견을 구한 것은 사실이지만 국정을 농단했다는 확증은 아직 없지 않은가.

의혹을 제기하는 사람들의 주장을 듣고 있노라면 최순실은 원더우먼이다. 연설문도 다듬고 영어 통역도 하고 대통령의 패션도 관리하고 국정의 방향까지도 결정했다고 한다. 이런 거의 전지전능한 사람이 유독 태블릿의 관리만은 왜 소홀히 했을까. 태블릿에는 문서의 작성과 편집에 쓰이는 앱(응용프로그램)은 없다. 그렇다면 그 안에 담긴 문서 파일은 어디선가 만들어진 것을 받아보기만 했다는 얘기인데, 호가호위할 목적으로 과시하는 데 이용한 것은 아닐까. 이처럼 의혹 자체에 대해서도 많은 합리적인 의심의 여지가 있다.

그래서 먼저 사실관계의 확인이 필요하다. 나라가 어떻게 되든 그저 정권에 흠집을 낼 정략적 목적이 아니라면 사실이 확인도 되기 전에 억측으로 정권 퇴진을 외치는 것은 옳지 않다. 검찰이 조사하고 있으니 기다려야 하고 미덥지 않으면 특검을 통한 조사를 해야 할 것이다. 이런 면에서 특검에 대한 제1야당의 입장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3개의 전제조건이 충족돼야 특검에 동의하겠다는 건데 조사도 하기 전에 결론부터 내자는 요구이기 때문이다.

사실 확인의 중요성은 이 정부 초기를 흔들었던 이른바 윤창중 성희롱 사건에서도 드러난다. 한 언론이 성희롱을 기정사실화해 참혹한 인격 살인을 벌였고 국민도 이것이 모두 사실인 양 여기고 양은 냄비 끓듯 행동했다. 하지만 결과는 어떤가. 미국 경찰은 조사 끝에 혐의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지금이라고 비슷한 일이 벌어지고 있지 않다고 단언할 수 있을까.

지금이야말로 모두가 냉정해질 필요가 있다. 최순실 고영태 차은택 등 의혹의 중심에 있는 인물들이 모두 귀국했으니 조사 후 불법 사실이 있으면 처벌하면 된다. 대통령의 중대한 위법이 있으면 그때 가서 퇴진운동을 벌이든지 아니면 퇴임 뒤 형사소추하든지 하면 된다. 의혹만 가지고 예단해서 국정 자체를 마비시키는 것은 나라 전체에 피해가 미친다. 비서진 총사퇴 등 대통령도 필요한 조치를 취하기 시작한 것 같으니 조금만 기다려 보자. 是日也大聲呼訴(시일야대성호소, 오늘 큰 소리로 호소한다). 모두 나라를 생각하며 조금은 냉정해지자.

이영조 < 경희대 국제대학원 교수 / 정치경제학 yjlee@khu.ac.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