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삼성물산 사태'의 과제, 제대로 풀어야
지난 17일 삼성물산의 주주총회가 끝났다. 52일 동안 한국 자본시장을 떠들썩하게 한 삼성과 엘리엇매니지먼트의 한판 힘겨루기는 삼성의 승리로 끝났다. 누구의 승리를 떠나서 이번 사태는 한국 자본시장과 기업들에 많은 점을 시사한다.

이번 사태의 본질이 국내 기업에 대한 투기성 헤지펀드의 공격이라고 보는 데에는 재계나 시민단체의 시각이 일치하는 듯하다. 다만 그 원인과 해결방안에 대해서는 확연히 다르다. 재계는 이번 공격의 주된 원인이 공격자에게 유리하고 방어자에게는 불리한 불공정한 경영권 경쟁 제도에 있다고 본다. 그 때문에 포이즌필이나 차등의결권과 같은 방어수단이 필요하다고 한다. 반면 시민단체 등에서는 삼성의 건전하지 않은 지배구조가 원인이며 황금낙하산, 초다수결의제 등 기업들이 사용해온 방어수단만으로도 충분하다고 한다. 오히려 미국의 ‘세이 온 페이(say on pay)’ 제도나 기관투자가 중심의 주주협의체 같은 제도 도입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과연 지배구조의 불건전성 때문에 삼성이 공격을 받았을까. 한국기업지배구조원의 ESG(유엔 사회책임 투자원칙의 핵심요소인 ‘환경, 사회, 지배구조’) 평가결과를 보면 2013년 삼성물산, 제일모직, 삼성전자 등 주요 삼성그룹사는 국내 상위 5% 안에 드는 A등급의 평가를 받았다. 2014년에는 삼성물산만 B+ 등급을 받았을 뿐 여전히 다른 계열사들은 A등급을 받았다. 삼성그룹의 지배구조가 건전하지 못하다면 나올 수 없는 평가결과이며, 지배구조가 취약해서 경영권이 공격당했다는 말이 설득력을 가질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2010년 법무부 발표 자료에 따르면 황금낙하산, 초다수결의제 등 기존 방어제도는 한국 법률에 허용여부가 불분명하거나 고비용으로 효율성이 떨어지는 제도들이기 때문에 신주인수선택권(포이즌필)과 같은 저비용·고효율의 방어수단 도입이 필요하다고 하고 있다.

미국은 임원보수를 주주총회에서 정하지 않고 이사들이 정하기 때문에 세이 온 페이 제도를 통해 그 내용을 주주총회에 보고하고 승인받도록 하고 있다. 이때 주주들의 승인은 법적 구속력이 없다. 즉, 미국은 임원보수에 대한 통제가 법적으로 보장되지 않고 그 수준도 법적 효력이 없는 승인에 불과하다. 그런데 한국은 임원보수에 대한 주주들의 통제가 법적으로 보장되고 있다. 즉 주주총회에서 임원보수한도를 승인받아야 하고 승인받지 못하면 보수지급도 할 수 없다. 세이 온 페이보다 더 강력한 주주 권한이다.

이번 엘리엇의 공격이 과연 삼성물산의 지배구조 탓이며, 기존 경영권 방어수단으로 충분한지에 대한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법률에 따라 적법하게 산정한 합병비율을 불공정하다고 하며, 위헌소송 가능성을 제기하는 등 한 나라의 법이나 제도까지 좌지우지할 수 있다는 투기성 헤지펀드의 공격을 더 이상 받고 있을 수는 없다. 그 공격 때문에 지난 52일간 삼성 임직원이 본업은 뒤로 한 채 의결권 확보를 위해 뛰어다니고 신문, TV 광고에 쏟아부었던 유무형의 기업 손실이 막대하다. 제대로 된 경영권 방어수단만 있었다면, 오로지 주주의 이익으로 환원될 수 있는 소중한 재산이었다.

포이즌필이나 차등의결권을 도입해달라는 재계의 요구는 기업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적어도 인수합병(M&A)에 대한 공격과 방어가 균형을 이룰 수 있는 공정성을 확보해 달라는 것이다. 반(反)재벌 정서와 경제민주화라는 이념적 가치에 밀려 한국 기업들이 불평등한 경영권 경쟁 환경 속에서 창도 방패도 없이 견뎌내야 하는 현실을 이제는 제대로 해결하기 위해 정부와 국회가 적극 나서야 할 것이다.

정구용 < 한국상장회사협의회 회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