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sjung@sam-woo.co.kr 노무현 대통령이 토론문화를 언급한 이후 이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실제로 대통령 자신이 격식을 파괴하고 평검사들과 아슬아슬하고 열띤 토론을 벌인 일은 그 결과를 차치하고라도 신선한 충격이었다. 토론문화 활성화는 우리가 토론 불모지대에 살고 있다는 점에서 아주 바람직한 일이다. 나는 경영에서도 대화와 의논이 문제의 해법을 찾는 지름길이라고 생각해 왔다. 토론을 통해 더 많은 사람의 의견을 듣고 최대 공약수를 찾는 것이야말로 시장에서 승리할 수 있는 길이다. 이런 의미에서 경영학의 귀재 피터 드러커가 '경영자의 조건'이란 책에서 한 말이 가슴에 와 닿는다. "의사결정시 첫 원칙은 의견의 차이가 없을 때에는 결정을 내리지 말아야 한다.경영자의 결정은 만장일치와 같은 방법으로는 도달하기 어려운 종류의 것이다.경영자의 결정은 의견을 달리하는 사람들이 충분히 토론을 하고,그 상이한 판단들을 두고 취사선택함으로써 비로소 이뤄질 수 있다." 그런데 우리의 토론 문화는 요란하기만 하지 본질과 어긋나는 경우가 많다. 남의 좋은 의견을 수용하기보다는 배척하고 제압하기 위한 '말들의 전쟁'이 그것이다. 토론의 목적은 승리가 아니라 개선이라는 말도 있건만,일부 정치인들은 의견이 다르다고 해서 핏대를 올려가며 우격다짐으로 상대를 밀어붙이는 행태를 수없이 보아오지 않았던가. 소크라테스는 항상 싱글벙글 웃음 띤 얼굴로 그의 논설에 대한 반대자의 의견에 귀를 기울였다고 한다. 반대를 새로운 영광의 자료로 받아들인 것이다. 토론은 남의 의견을 수용하려는 자세 없이는 불가능한 것인데 우리의 주입식 교육은 한번 머리에 입력하면 거기서 헤어날 수 없는 것이 큰 탈이다. 미국의 대학 교육을 예로 들면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학생들 스스로 밤새 읽고 와서 강단에 선 교수와 이에 대한 토론으로 일관하고 있다. 우리는 학생이 읽어야 할 것을 교수가 읽고 주입시킨다. 토론 문화가 양성될 수 없다. 하지만 교육만 탓하고 있을 겨를이 없다. 서둘러 사회 전반적인 토론 문화를 정착시켜야 할 때이며 이에는 남의 말을 껴안을 수 있는 금도(襟度)있는 열린 가슴이 우선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