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순원 : 자네도 이젠 자리가 잡혔나보네.

서정주 : 아따, 나보다 얼마나 일찍 왔길래. 그나저나 자네 이젠 도로 소주를 마시나 보지? 한동안은 국산 와인만 마시지 않았나.

황순원 : 그때야 건강이 그랬으니까. 여기서야 건강 따지지 않으니까 소주로 돌아왔지. 뭐니뭐니해도 소주는 우리나라 국주(國酒) 아니겠나. 자넨 여전히 맥주지?

서정주 : 물론 물론.그나저나 여기까지 와서도 술을 끊을 수가 없으니…. 생각해 보면 참 징한 인연이지.

황순원 : 우리 생애의 절반이 그것 아니겠나. 요즘이야 젊은 문인들도 술을 자제하는 모양이지만. 우리보다 성실하다는 이야기지만.

서정주 : 글쎄 예술이란게 꼭 성실만으로 성취된다던가? 풍류도 있고 광기도 있어야…. 그래도 자네야 점잖게 살아온 셈 아닌가.

황순원 : 이러지 말게.나도 나름대로 풍류를 찾은 사람이야.

서정주 : 그나저나 동리는 어디 갔나.

황순원 : 그 친구는 까마득한 고참이라고 따로 논다는구먼.

서정주 : 고집은 여전하고.

황순원 : 예술가라면 고집도 있어야지. 요즘 젊은 작가들을 보면 너무 고집들이 없는 것 같애. 그저 여기저기 눈치나 보고. 시류를 따라 가려고만 하는 눈치고, 풍류도 없고,고집도 없고 원칙도 없고….그런 풍토에서 과연 큰 작품이 나올 것인지 걱정이야.

서정주 : 다들 사는게 힘이 드니 그러지 않나. 국민 모두가 겪는 경제 위기에다 갈수록 책은 안 팔리고…. 작가들이 작품에 대한 고민보다도 생계에 대한 고민을 더해야 하는 시대가 아닌가 말이야. 그러다보니 이제는 문학단체들도 지난 날처럼 표현의 자유니 하는 거창한 문제보다는 작가들의 생존권 보장에 목소리를 높여야 하는 형편이고.

황순원 : 언제는 작가들이 남보다 풍요롭게 살던 시대가 있었나? 다들 나름대로 힘들었지. 그 성격이 조금씩 달라질 뿐이지. 작가나 예술가가 겪는 사회와의 부조화는 항상 존재하는 거야. 그 부조화를 이겨내는게 작가의 정신 아닌가.

서정주 : 자네야 그렇게 평생 소신을 관철했으니까. 난 자네가 부러워.

황순원 : 난 자네의 거침없는 생각과 행동이 부러웠어. 그야말로 천의무봉.

서정주 : 그러다보니 실수도 했지만.

황순원 : 이제와서 누가 탓하겠나. 다른 속셈이 있었던 것도 아니겠고. 그것도 다 시인다운 천진함에서 나온 거 아닌가. 자네는 여기와서도 시를 계속 쓴다면서.

서정주 : 써야지. 넋이 있는 한 써야지. 그게 시인 아닌가. 자네야 이승에서 이미 절필한지 오래지만.

황순원 : 내 생각은 그래. 한 작가가, 지금까지 써온 것보다 나은 작품을 쓸 수 없다고 생각되면 그 즉시 펜을 놓아야지. 스무살, 서른살에라도 인간으로서나 작가로서나 난 구차한 모습 보여 주기가 싫었어.

서정주 : 그 구차하다는 것도 인간의 모습 아닌가. 하하하.

황순원 : 아니 저기 오는건 운보 아닌가.

김기창 : 나도 술 한잔 주구려.

서정주 : 기색이 왜 그런가. 여기까지 온 마당에 뭐 언짢은 일이 더 있을 거라고.

김기창 : 아래 세상을 보니 그렇지 않나. 아 글쎄 미협 이사장을 뽑는데 장충체육관을 빌리고, 지방에서 관광버스로 회원들을 실어오고. 정치판 선거를 방불케하니 이거야 원. 그런 정열로 그림 한폭이라도 제대로 그릴 생각들이나 하지 않고.

서정주 : 뭘, 그런 정열도 소중한 거지.

황순원 : 맞아. 그리고 우리가 이렇게 걱정한들 무엇하겠나. 생활에서나 작품에서나 젊은이들에겐 젊은이들의 몫이 있으니까. 다들 해내겠지. 그나저나 운보,당신 이젠 말을 잘하네?

김기창 : 여기서야 장애니 불구니 하는게 없으니까. 하하하.

황순원.서정주 : 하하하하.

작년 9월부터 올해 1월 사이에 황순원.서정주.김기창 선생 같은 거목들이 차례로 세상을 떠나셨다.

저승이 있다면 그곳에서 그분들은 이런 대화를 나누고 계시지나 않을까.

안타까운 마음에 횡설수설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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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 약력 =

△경희대 국문과 졸업
△소설 ''빙벽'' ''최후의 계엄령''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