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가 울먹인다.

세계가 흐느끼며 바라본다.

반세기 만에 만나는 혈육의 통곡이 온 세상을 적신다.

무엇이 그렇게 중요했을까.

무엇이 혈육의 정을 훌쩍 뛰어넘는 대단한 것이 있었던가.

생이별로 찢어놓은 이산가족들은 젖먹이로 떨어져 이미 머리가 센 나이가 됐다.

목이 터져라 불렀던 아버지 어머니는 결코 눈감지 못하는 한을 사르지 못한 채 고인이 되었다.

이러한 민족 비극의 주체가 무엇이었는지 지금은 그것마저 따지고 있을 시간이 없다.

중요한 것은 ''우리는 만났다''는 것이다.

북의 비행기가 서울 김포공항에 내리는 것을 우리는 보았다.

북의 비행기가 이 땅에 내리는 순간,우리의 손과 발끝에는 전율이 일었다.

지르르 지르르 저려오지 않았는가.

15년 전에 1차적 만남이 다시 무슨 연유로 결빙되면서 우리는 막막한 기다림 속에 갇혀 있어야만 했었다.

만남은 다시 이루어졌고,이 만남은 왠지 신뢰가 가는 쪽으로 기울어지는 기쁨이 있다.

그렇다.

''잘 될 것''이라는 이 믿음이 어쩌면 오늘의 남북상봉을 마련하게 되었는지 모른다.

죽기 전에 반드시 만나야 한다는 혈통의 의지가,그런 국민의 불타는 소망과 희망이 정부로 하여금 새로운 시대를 열어야 한다는 힘을 실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처음엔 필자도 너무 흥분하는 것이 아니냐고 의심한 게 사실이다.

왜들 헛춤을 추느냐고,뒷날의 허탈을 염려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루어지고 있다.

문이 열리고 있다.

살을 부비고 눈물을 섞으며 혈육들은 뼈시린 회한으로 뒹굴고 뒹군다.

그러기에 겨우 열린 문을 더 큰 문으로 열어야 한다.

제도적인 상설기구를 만들어 상호왕래가 현실화되어야 하고 면회소 설치 등이 이루어져 근본적 문제가 확실한 근거로 설정되어야 할 것이다.

10월쯤의 두 번째 만남 이후에는 집에서 각자 만날 수 있어야 한다는 여론도 말의 친절에서 끝나지 않고 현실화 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보았다.

죽음이 언제 닥칠지 모르는 병약한 어머니 아버지가 아들의 손 한번 잡기 위해 서로 안고 무너지는 것을.

혈육은 죄가 없다.

그들은 너무나 길고 긴,고독하고 아픈 유배의 형을 살았었다.

이제는 풀어야 하지 않겠는가.

오직 지구상의 하나, 분단의 죄목을 지금은 명분있게 풀 때가 되었다.

인간의 염원이 얼마나 무력한 지 우리는 오래 경험한 바 있다.

1천만 이산가족의 불타는 소망도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그러나 보았다.

그들이 만나 우는 통곡의 눈물이 세계를 적시고 휘돌아 증오와 긴 세월의 한을 녹여 없애는 것을.무엇을 주랴,무엇을 말하랴,그래 50년 세월을 그 짧은 시간에 전달하기는 가당치도 않은 일이다.

그것이 말로 되는 것이더냐.그들은 다만 통곡하며 울고 울었던 것이다.

절대 기다림의 끝에 꽃을 피운 것이다.

한반도에 넘치는 눈물의 꽃,그 꽃은 지난 세월을 따뜻한 사랑의 꽃으로 변화시키는 기적이다.

그러나 우리는 다시 확인하지 않으면 안된다.

왠지 불안감도 없지 않다.

다시 까닭모를 핑계로 상승기세가 하강하는 날이 찾아올까 두려운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외치고 싶은 것이다.

''지금 우리는 시간이 없습니다''라고.

그렇다.

시간이 없다.

우리에게 시간처럼 냉혹한 것은 없다.

반세기를 공백으로 흘려보낸 이웃들이 생의 마지막 순간에 와 있다.

조금만 길이 멀어도,아차 하는 순간에 모든 기다림이 물거품 된다.

혈육이 함께 사는 일보다 더 중요한 게 어디 있겠는가.

세계가 평화공존으로 치닫는 이시대에 우리만 외로운 비극을 껴안고 있다.

불행한 일이다.

추석 전후 공사를 시작하는 경의선의 기적소리를 기다린다.

죽은 철로가 힘찬 기적을 울리며 북으로 남으로 향하는 통일의 그날.우리 마음속에 50년 묵은 앙금이 모두 가시고 인류애와 동포애가 새로운 얼굴로 찬란하게 떠오를 그 날을 기다리고 있다.

sdalja@unite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