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들은 그저 황혼기의 "은퇴자"일 뿐인가.

힘없는 "피부양자"로 생을 마감하는 부담스런 존재인가.

그래서 영영 푸대접만 받을 것인가.

지금은 어떨지 모르지만 새 밀레니엄에선 그렇지 않다.

수적으로 뭉친 막강한 정치세력이 된다.

"돈"을 거머쥐고 쓸 줄아는 소비집단으로 부상한다.

긴 세월 동안 온갖 역경을 이겨낸 현자이기도 하다.

체력은 떨어지지만 지력과 금력은 젊은이들을 압도할 수 밖에 없다.

노년층을 일컫는 용어가 "실버세대(Silver age)"에서 "황금세대(Golden
age)"로 바뀐 데서 그 변화의 기류를 예감할 수 있다.

수적으로나 파워로나 새 세기에선 노인들이 주역의 한 축을 이루리라는
말이다.

결코 쓸쓸한 말년을 위안하는 말이 아니다.

선진국에선 이미 정치.경제.사회 전분야에서 노년층의 영향력이 막강해지고
있다.

의학의 발달과 인식의 변화가 노인들을 "경노당"에서 "사회현장"으로 끌어
내고 있다.

노인에 대한 인식과 대접이 달라져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 급증하는 노인층 =선진국들은 이미 "고령사회(Aged society)"로 들어서
있다.

65세이상 인구의 비중이 14%를 넘은 사회다.

이쯤되면 머릿수로만 쳐도 경제활동인구 4명중 1명꼴이다.

평균수명은 나날이 길어지고 있다.

우리나라는 이제 "고령화사회(Aging society)"로 진입하는 단계다.

작년말 현재 65세 이상 노인은 3백20만8천명.

전체 인구의 6.9%다.

내년엔 7.1%로 늘어나면서 7%선을 넘어서 고령화사회가 된다.

하지만 지금의 속도로 가면 우리나라도 2021년엔 노인인구 비중이 14%를
넘어서게 된다.

불과 21년 만에 고령화사회에서 고령사회로 바뀌는 것이다.

이 속도는 프랑스 미국 영국 등에 비해 2~6배나 빠른 것이다.

엄청나게 불어나는 노인층은 단순히 머리숫자만 많은데 그치지 않기에
미래의 주역으로 평가받는다.

<> 미래의 소비주체 =그들의 힘은 앞으로 "경제력"으로 나타날 것이다.

선진국에선 이미 그 힘을 유감없이 보여 주고 있다.

요즘 미국의 TV를 보면 노인들이 광고에 자주 등장한다.

백발의 신사가 스포츠카를 몰기도 하고 나이든 할머니가 의류모델로
나오기도 한다.

이미 거대한 "고령시장(Gray market)"이 형성돼 있다는 실례다.

영국에선 국부의 80%를 55세 이상이 쥐고 있다는 통계가 나와 있다.

전체 소비의 40%를 담당하는 것도 그들이다.

일본의 실버산업 규모는 연간 80조엔에 달한다.

특히 미국에선 베이비 붐 세대(35-55세)를 주목하고 있다.

수적으로도 가장 많을 뿐 아니라 지난 20년간 미국의 소비를 주도한 계층
이기도 하다.

외식과 오락에 익숙해져 있고 소비의 미학을 아는 이들이 곧 은퇴자 대열에
합류하게 된다.

노인이기를 거부하는 "노노(No노)세대"인 이들이 노령시장에 진입할 경우
유통시장은 대변화를 피할 수 없게 된다.

물론 우리나라의 사정은 열악하기 짝이 없다.

하지만 은퇴자들이 구매력을 가진 집단으로 발전할 수 있는 여건이 서서히
만들어지고 있다.

내년 7월부터는 농어촌의 국민연금 가입자에게 특례노령연금이 지급된다.

오는 2002년에는 연금을 받는 노인이 1백6만명으로 늘어난다.

2008년부터는 10인이상 사업장에서 일하다 은퇴한 사람들도 노령연금을
받기 시작한다.

그때가 되면 국내에서도 선진국과 같은 "그레이 마켓"이 본격적으로 형성될
것이다.

더구나 노인들의 의식 자체가 과거와 달라지고 있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조사에 따르면 64세이하 비노인층의 67.7%가 "재산을
자식에게 물려주지 않고 죽을 때까지 가지고 있겠다"고 응답했다.

한푼이라도 아껴서 물려 주겠다는 의식이 사그러들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노인에 대한 제도적 보장이 강화되고 노인 스스로의 의식이 "삶의 질"
쪽으로 흐르는 한 노인들의 구매력은 커질 수 밖에 없다.

<> 강력한 정치집단=많은 숫자와 경제력은 또다른 사회적 세력판도를
만들어 내고 있다.

노인들이 정치.사회적인 이슈에 강력한 발언권을 갖는 압력단체로 발전하는
것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미국은퇴자협회(AARP).

이 협회엔 50세이상의 회원 3천3백만명과 3천5백만명의 준회원이 가입해
있다.

고용된 로비스트만도 1백50명이다.

65세이상의 노인에게 무료 의료혜택을 주도록한 "메디케어"를 법제화하고
기업의 정년제를 폐지시킨 주역이 바로 AARP다.

요즘은 노인채용을 기피하는 기업들을 대상으로 소송전을 벌이고 있다.

회원들에게 노인의 권리를 옹호하지 않는 정치인들을 지목한 정보를 끊임
없이 보내주고 있다.

선거참여 캠페인도 벌인다.

AARP는 한국의 노인단체와도 연계를 모색하고 있다.

<> 축적된 지혜 =무엇보다 노인들을 사회의 머리로 추앙받게 하는 힘은
그들의 "경륜"이다.

온갖 풍상을 겪은 노인들의 경험은 후세를 이끄는 정신적인 지주다.

미래가 지식.정보화사회라고 하지만 학자들은 "정보(Imformation)"와
"지식(knowledge)" 위에 "지혜(wisdom)"가 있다고 말한다.

정보와 지식이 아무리 많아도 그것들을 사회에 유익하게 쓸 수 있도록
유도하는 곧은 지도이념이 있어야 사회가 발전한다는 논리다.

바로 그 지혜를 노인들이 가지고 있기에 지식.정보화사회에서도 노인들의
우위는 결코 훼손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실제로 영국의 한 통계를 보면 기업들이 5년이상 생존할 수 있는 확률이
평균 19%이지만 사주의 나이가 55세 이상인 기업은 70%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무작정 돈벌이에만 신경을 쓰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알고 위험을 피해가는
혜안이 있기에 기업이 장수한다는 것이다.

젊은이들과는 달리 넒은 인맥을 가진 것도 기업생존에 큰 도움이 되는
것으로 분석됐다.

일본에선 90년대들어 창업한 벤처기업주의 37%가 50세이상이다.

40대가 35%, 30대가 24%인 것과 비교하면 놀라운 비율이다.

노인들은 사회로 들어오고 싶어 한다.

그럴 자격과 능력도 충분하다.

길을 닦고 문을 열어주는 것이 자식세대의 의무다.

그러게 하지 않으면 힘으로 열고 들이닥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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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별취재반 = 남궁덕(사회1부) 기자 nkduk@
고기완( " ) 기자 dadad@
김광현( " ) 기자 kkh@
김도경( " ) 기자 infofest@
김병일(경제부) 기자 kbi@
박수진(국제부) 기자 parksj@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9월 27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