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도 국회의사당 본회의장앞 화장실-.

그 곳에 들어갔던 한 국회의원이 깜짝 놀랐단다.

국회하면 의원들 스스로도 다소 딱딱하고 권위적으로 느껴지던 곳이었는데
국회에 대한 인식을 바꾸게 된 새로운 경험을 했기 때문이라나.

화장실벽에 붙어 있던 시 한구절이 그 이유였다.

"이까짓 산구석에 처박혀 발버둥친들 무엇하랴/비료값도 안나오는 농사따위
야/아예 여편네에게나 맡겨 두고/쇠전을 거쳐 도수장 앞에 와 돌 때/우리는
점점 신명이 난다/한 다리를 들고 날나리를 불꺼나"(신경림의 "농무" 중에서)

이 시를 읽는 순간 어릴적 고향생각과 농사를 지으시던 부모님생각, 이 시각
생활의 터전을 잃고 바다를 헤매고 있을 우리 어민들의 수심어린 얼굴이
교차하더란다.

정치인 모두가 좀 더 국정에 충실하고 국민을 위하는 마음이 이 시와
같았더라면 지금과 같은 고난은 오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자신을
되돌아 보게 되더란다.

지난 몇달간 시사랑 모임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했다.

대체 누가 화장실마다 시를 붙여 놓을까? "국회 시사랑회"라는 모임이 있는
것 같기는 한데,누구도 자신이 회원이라고 나서지 않았다.

얼굴없는 모임 "국회 시사랑회"는 이렇게 시작했다.

시를 통해 삶의 아름다움과 진실함을 느끼려는 직원들이 하나 둘씩 모여
시의 마을을 이루게 된 것이다.

그동안 모임을 가지면서 "아름다운 시의 향기를 좀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전할 수 없을까"하는 고민끝에 화장실에 매주 한편을 붙여 놓기로 했다.

국회는 의원뿐만 아니라 민원인, 방청객, 각 지방의 유권자, 기자 등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출입하는 곳이다.

한번쯤 화장실을 이용해 본 사람들은 깜짝 놀란다.

시가 있는 국회라니.

이런 면도 있었나-.

시의 한쪽 여백에 빼곡히 적혀있는 감상과 격려의 글을 읽을 때면, 우리의
작은 노력이 결실을 맺는 것 같아 보람을 느낀다.

작은 촛불이 어두운 밤을 밝히듯, 우리의 작은 노력으로 직장에서 사회를,
사회에서 국가를 밝히는 데 이바지하고 싶다.

모임이 만들어진지 1년이 되어가는 지금은 장인성, 이요섭 두 시인을
고문으로 모시게 되었고 박실 국회사무총장은 화장실마다 시를 담을 수 있는
자그마한 게시판을 만들어 주는 신경을 써주었다.

사실 우리는 약간 겁이 난다.

아무도 모르게 시작하고 작게 만들어 가려고 했는데 이제는 모두
알아버렸으니, 조금 지치고 힘들다고 그만둘 수도 없는 처지가 되어 버렸다.

하지만 이제 많은 사람들의 기대와 호응에 좀 더 욕심을 내볼까 한다.

지금은 문학과 시를 사랑하는 국회의원, 직원들이 함께 할 "문학의 밤"을
준비하고 있다.

또 고아원을 찾아가, 사랑에 목말라있는 아이들과 함께 동시를 읽을
계획이다.

그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주기 위해..

최경희 < 총무 (국회 정보위원회 근무)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4월 16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