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한말에 내부대신까지 지낸 하산 남정철이 45세때 천진주 독이사무로
일하면서 외교활동의 비화를 적어 놓은 "대담록"이라는 글이 있다.

그 가운데 1884년 오장경 이홍장등과 담판을 벌인 대화내용이 눈길을 끈다.

하산이 이홍장에게 조선인삼수출에 15%의 세금을 물리는 것은 너무과하다고
세율을 내릴것을 주장하자 이홍장은 중국상인들이 서울에 점포를 내게 해줄
것을 요구해 왔다.

그러나 이홍장의 요구에 대한 하산의 대답은 아주 강경하다.

하산은 조선상인을 보호하기 위해 서울의 10리안쪽으로는 중국인 점포를
내줄수 없다는 입장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한국에 화교가 처음 들어 온 것은 그보다 2년뒤인 1882년으로 추정된다.

임오군난때 한국에 파견된 광동성 수사제독 오장경의 군대를 따라 40여명의
상인이 함께 입국했는데 이들이 한국화교의 시초가 됐다는 것이 통설이다.

중국은 바로 이 해에 조선에 통상조약을 강요해 화교가 들어 오는 길을
터놓았다.

1983년 중화민국 한국연구학회가 간행한 "여한60년견문록"에 따르면
1883년에 서울 인천 등 주요도시에는 이미 320여명의 화교가 살고 있었고
이듬해인 1884년에는 "화상조계지"가 설립됨에 따라 서울에 350여명, 인천에
250여명 등 모두 700여명으로 급증했다.

이어 화상조계지가 1887년 부산, 1889년 원산에 설치됨에 따라 화교는
인천에서만도 1,000명을 넘어서기 시작했다.

90%가 산동성출신인 화교의 상술은 지금도 유명하지만 일제시대에
일본인들도 두려워했을 만큼 뛰어났다.

1923년 서울 인천의 화교 6,000여명이 본국에 송금한 액수가 줄잡아
1,000만엔에 이르고 있었다는 조선촉독부의 통계를 보면 놀랍기만 하다.

19세기말 한때 1만여명의 화교가 살면서 "차이나타운"으로 흥청거렸으나
60년대이후 중국인 500여명이 사는 빈민가로 몰락해버린 인천의 선린~
북정동 일대 "중국인거리"를 인천시가 관광명소로 만들 계획이라고 한다.

과거에 유명했던 청요리집도 다시 경영하도록 지원하고 중국특산품판매장도
만들어 "인천속의 작은 중국"으로 가꾸어 가겠다는 생각이다.

임진왜란이 끝난뒤 왜군들이 조선에 귀화해 살던 곳을 당시 사람들이
"이타인"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곳이 지금의 "이태원"이다.

지금도 이태원에 외국인들이 붐비는 것을 보면 재미있다.

땅의 인연이란 그만큼 끈질긴 것인가 보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2월 8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