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총리 윈스턴 처칠경이 중대한 방송연설을 하기위해 공영방송인 BBC에
급히 가야할 일이 생겼다.

그런데 어떤 연유에선지 택시를 타야할 처지에 놓였다.

약1시간 거리에 있는 BBC까지 가기위해 택시기사에게 태워줄것을 요청
했더니 다른 차를 이용해 달라는 반응이었다.

이유를 물어본 즉 "한시간 후면 윈스턴 처칠경의 중대방송이 있는데 그것을
꼭 들어야 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처칠경은 기분이 좋아 택시기사에게 1파운드를 건네줬다.

그러자 택시기사의 응답은 이런 것이었다고 한다.

"좋습니다. 어서 타십시오. 처칠인지 개떡인지 돈부터 벌고 봐야
겠습니다"

어느 책에 소개된 일화 한토막이다.

다소 작위적인 에피소드라고 생각되지만 우리주위에서 흔히 일어나고 있는
현상이다.

우리사회에서 좋은 일이건 나쁜일이건 각종 사건사고는 대부분 돈과
관련돼 있다.

개인은 물론 기업이나 정부 단체 정당할것 없이 사회의 모든 구성원들을
울리고 웃길수 있는 만능의 힘을 가진 것이 돈이다.

"돈만 있으면 귀신도 부릴수 있다"는 속담은 돈의 위력을 가장 적절히
묘사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여기에서의 돈이란 부나 재력을 지칭하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의 부나 재력은 우리가 흔히 "돈"이라고 부르는 "화폐"로
평가된다.

이러한 화폐의 물리적인 실제가치는 별게 아니다.

어느 권종이든 제조원가를 따져보면 기껏해야 한장에 50~70원밖에 안된다.

그런데도 이들이 갖는 가치(구매력)는 어느것은 1,000원, 어느것은
5,000원, 어느것은 1만원에 달한다.

좀더 범위를 넓혀 어음 수표까지 화폐에 포함시킨다면 종이한장에
수십억원 수백억원의 가치를 갖는 것도 있다.

이것은 다이아몬드와 같이 희귀한 것이어서도 아니고 그렇다고 수요가
많아 경매에 의해 매겨진 값도 아니다.

순전히 국가나 발행기관이 부여한 가치에 근거한 것이다.

화폐의 경우 국가가 그만큼의 가치를 법적으로 인정한 셈이다.

바꿔말하면 이러한 법률적 권위를 믿고 모든 사람들이 함께 지켜 나가는
것으로 볼수있다.

만약 화폐의 이러한 법적 권위와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어떤 결과를
가져올까.

한마디로 경제가 혼란에 빠진다.

예컨대 부동산투기가 일고 물건사재기가 나타나는 것은 이러한 화폐의
법적 권위가 손상을 입은 결과라고 볼수있다.

중앙은행인 한국은행이 화폐가치의 안정을 강조하는 것은 이런 연유에서다.

며칠전 우리나라의 화폐를 도맡아 찍는 조폐공사에서 인쇄해 놓은 돈이
유출된 사고가 발생했다.

1,000원권 1,000장이 없어진 것이다.

전체액수로 보면 100만원에 불과해 일종의 해프닝으로 치부할만도 하다.

그럼에도 충격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은 화폐의 권위와 국가신용에 손상을
입힐수 있는 탓이다.

범인이 잡혀 빠른 수습국면으로 접어들고 있지만 오히려 범인이 밝혀지기
전보다 더 씁쓸하고 더 허전한 감정만이 남는다.

"여직원이 여관비마련을 위해" 훔쳤다는 사실이 어찌보면 국가 회사 나아
가서는 국민을 우롱하는 것같은 느낌때문이다.

차라리 "국가경제를 교란시킬 목적으로" 또는 "회사에 앙심을 품고" 범행을
했다고 한다면 오히려 편안한 마음이 들것 같다.

우리사회에 도덕불감증이 여기까지 와있는가.

이는 누구의 탓인가.

회사는 무얼했고 그 까다롭다는 감시체제는 어떻게 됐는가.

어안이 벙벙할 뿐이다.

"돈을 찍어내는 일이 국가경제에 중요한 일"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어야
하고 교육을 시켜야만 안다는 말인가.

조폐공사의 최고경영층에서부터 말단직원에 이르기까지 속된 표현으로
"나사가 풀려도 완전히 풀린"상태가 아니면 일어날수 없는 일이었다.

아무도 확인하지않고 아무도 못보았고 재고확인을 한 날짜보다 돈을 썼다는
날짜가 더 앞서고 있으니 어찌된 영문인지 모르겠다.

X세대의 빗나간 세태라고 질책만 할것인가.

정치지도자, 정부고위층, 기업경영인, 학계, 언론계, 문화계 할것없이
우리사회의 지도층에게는 부끄러움이 없는가 반성해볼 일이다.

행여 돈이나 명예때문에 도덕을 팽개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기야 "귀신을 부릴수도 있다"는 돈이고 보면 도덕쯤이야 쉽게 포기할수
있는 것이 우리의 실상이 아닌가 싶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6월 18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