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시립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백남준 탄생 90주년 기념 작품인 ‘21세기 시스틴 예배당’. 1993년 베네치아비엔날레에서 황금사자상을 받은 작품으로 30년 만에 복원돼 울산시립미술관의 소장품이 됐다.  울산=김보라 기자
울산시립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백남준 탄생 90주년 기념 작품인 ‘21세기 시스틴 예배당’. 1993년 베네치아비엔날레에서 황금사자상을 받은 작품으로 30년 만에 복원돼 울산시립미술관의 소장품이 됐다. 울산=김보라 기자
지난 2일 찾은 울산시립미술관은 평일인데도 발 디딜 틈이 없었다. 가장 많은 사람이 몰린 곳은 백남준 탄생 90주년 기념 전시인 ‘21세기 천지창조 시스틴 예배당’. 40여 대의 빔프로젝트가 현란한 빛으로 춤을 추는 시스틴 예배당은 ‘미술 올림픽’으로 불리는 베네치아비엔날레에서 금메달(1993년 황금사자상)을 딴 작품이다. 이탈리아 베네치아에서 전시가 끝난 뒤 철거된 걸 30년 만에 복원해 이곳에 들여놨다.

이렇게 ‘30년 전의 백남준’을 만나러 이 미술관을 찾은 사람은 올 들어 11만 명에 달한다. 주민 수(3배)로 보나, 역사(24년)로 보나 훨씬 크고 오래된 부산 시립미술관(연간 방문객 약 30만 명)에 못지않은 규모다. 수도권이 아닌 지방에, 그것도 올 1월 문을 연 ‘신참 미술관’은 어떻게 미술계의 ‘핫 플레이스’가 됐을까.

광역시 승격 25년 만에 품은 미술관

울산이 광역시가 된 건 25년 전이었다. 하지만 웬만한 기초자치단체도 갖고 있는 공공미술관 하나 없었다. 이런 광역시는 울산뿐이었다. 현대자동차, 현대중공업, SK에너지 공장이 들어선 까닭에 메마른 ‘산업도시’ 이미지가 강했던 탓이다.

하지만 이들 기업이 승승장구하면서 지역민들의 소득 수준이 높아진 데다 2009년 문을 연 울산과학기술원(UNIST)을 중심으로 청년들이 몰려들자 울산시는 20년 넘게 ‘보류’했던 미술관 건립을 마침내 ‘승인’했다. 2019년 8월 677억원을 들여 착공한 미술관은 올 1월 문을 열었다.

울산시립미술관은 ‘늦은 출발’을 ‘차별화’로 만회했다. 부산, 대구 등 차로 1시간 거리에 있는 쟁쟁한 미술관과 맞서려면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미술관의 슬로건도 ‘실험성과 창의성으로 과거를 읽고 현재를 보며 미래를 담아내는 미술관’으로 내걸었다. 그러곤 “기술혁신으로 대한민국 제조업 강국을 만들어낸 도시의 정체성을 반영해 미디어아트 중심 미술관이 되겠다”고 선언했다.

실감 미디어아트 전용 전시장인 ‘XR랩(eXtended Reality Lab)’이 공공미술관 최초로 이곳에 들어서게 된 배경이다. 가상현실(VR), 증강현실(AR), 혼합현실(MR) 등 최신 디지털 기술의 미디어아트를 체험할 수 있는 공간으로 개관 초부터 화제였다. 소장품 1, 2, 3호가 미디어아트의 창시자 백남준의 작품인 것도 같은 맥락이다. 1호 소장품인 백남준의 ‘거북’은 백남준이 166대의 TV를 거북 형상으로 만든 대형 비디오 조각 작품으로, 울산의 대표 관광지인 반구대 암각화의 이미지와 연결된다. 미술관 덕분에 울산은 ‘노잼도시(재미없는 도시)’에서 ‘꿀잼도시’로 탈바꿈했다. SNS에 울산이 ‘꿀잼도시’로 태그된 것만 1만 건이 넘는다.

현대차도 SK도 ‘예술도시 울산’ 응원

울산시는 미술관 운영도 ‘혁신’했다. 대다수 국공립미술관은 한 해 5억~10억원의 예산을 책정해 1년 단위로 소장품을 산다. 그해에 작품을 안 사면 해당 예산은 사라진다. 울산시는 국내 최초로 ‘소장품 기금제’를 도입했다. 시 예산과 기부금 등을 모은 뒤 좋은 작품이 나오면 거금을 투입해 사들이는 방식이다. 그렇게 2017년부터 5년 동안 140억원을 모아 백남준의 작품 3점을 사들였다. 작품 선정은 전문가 30여 명으로 구성된 국제소장품 제안위원회가 맡는다. 이 같은 운영 방식은 서진석 관장이 주도했다. 1990년대부터 대안공간 ‘루프’를 만들어 미술 현장에서 신진 작가들을 발굴해온 현장형 리더다.

미술관 개관에 시민들이 열광하자 울산에 뿌리를 내린 기업들도 팔을 걷어붙였다. XR랩에서 전시 중인 세계적 미디어 아티스트 정연두의 ‘오감도’는 현대자동차와 SK에너지, 한국전력의 산업단지 등을 배경으로 1년간 제작됐다. 15분 분량의 이 작품은 까마귀떼로 가득한 울산의 겨울 하늘, 햇살이 부서지는 태화강, 푸른 물결의 바다와 끝없이 펼쳐지는 시원한 대나무숲 풍경을 공장으로 출퇴근하는 노동자들의 모습과 겹쳐내는 식으로 그렸다. ‘울산에 산다는 것’의 의미를 담은 이 작품의 촬영을 위해 기업들은 기꺼이 산업단지를 내줬다.

울산=김보라 기자 destinyb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