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플, XR 레이스에 불 붙였다
애플이 가상현실(VR)과 증강현실(AR)을 포괄하는 확장현실(XR) 기기 ‘비전 프로’를 공개하면서 이 분야의 시장 경쟁이 본격화했다. 애플은 비전 프로를 가리켜 ‘착용형 공간 컴퓨터’라고 설명했다. 팀 쿡 애플 최고경영자(CEO)는 “비전 프로는 오늘 일어나고 있는 내일의 공학이자 애플의 터닝포인트가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애플에 앞서 이 분야에 역량을 집중해온 메타도 신제품을 내놓으며 경쟁을 예고했다. 삼성도 퀄컴·구글과 협력해 메타버스 헤드셋 개발을 진행 중이다. 글로벌 기업들이 앞다퉈 시장에 뛰어들면서 메타버스 산업도 탄력을 받을 전망이다. XR 기기가 대중화되면 스마트폰 이상으로 일상의 삶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올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애플, XR 레이스에 불 붙였다
12일 정보통신기술(ICT) 업계에 따르면 애플은 지난 5일 미국 캘리포니아주 쿠퍼티노에 있는 애플파크에서 세계개발자콘퍼런스(WWDC)를 개최하고 애플 비전 프로를 공개했다. 7년여 만의 연구 끝에 등장한 비전 프로는 스키 고글처럼 생겼다. 머리에 착용한 뒤 AR 형태로 나타나는 앱을 사용할 수 있다. ‘착용형 공간 컴퓨터’라는 수식어처럼 PC와 스마트폰에서 수행하던 컴퓨팅 기능을 3차원 공간에서 구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별도의 컨트롤러 없이 눈과 손, 목소리를 이용해 기기를 제어할 수 있는 게 특징이다.

3499달러(약 457만원)라는 가격이 말해주듯 비전 프로는 현 XR 기기 중 가장 높은 사양을 갖췄다. 마이크로 유기발광다이오드(OLED) 디스플레이, 2개 자체 칩셋(M2, R1), 공간 음향 시스템, 항공우주 등급 경량 프레임, 공간 운영체제(Vision OS) 등으로 구성됐다. 사용자 움직임을 감지하기 위해 12개 카메라와 5개의 센서를 탑재했다. 아이폰 멀티터치에 이은 새로운 사용자 인터페이스를 도입했는데 눈동자, 손, 목소리로 제어한다.

쿡 CEO는 “맥이 개인용 컴퓨터 시대, 아이폰이 모바일 컴퓨팅 시대를 열었던 것처럼 애플 비전 프로는 공간 컴퓨팅을 선보이게 됐다”고 강조했다. 이어 “비전 프로는 플랫폼이며, 개발자들이 이를 위한 앱 개발을 시작할 수 있도록 빨리 공개하고 싶었다”고 덧붙였다.

○불붙은 XR 경쟁

애플, XR 레이스에 불 붙였다
애플이 비전 프로 공개를 계기로 메타버스 시장 경쟁이 한껏 달아오르고 있다. 선제적으로 VR 헤드셋 시장에 수십조원을 투입해온 메타에 애플이 도전장을 내민 모양새다. 메타는 2020년 ‘오큘러스 퀘스트2’, 지난해 ‘메타 퀘스트 프로’를 출시했다. 퀘스트2는 1000만 대 이상의 판매량을 기록했지만, 대중화엔 이르지 못했다. 메타는 애플의 제품 공개에 앞서 신제품 ‘오큘러스 퀘스트3’를 한발 빨리 공개하며 견제구를 던졌다. 전면 카메라를 통해 고해상도 컬러 혼합현실을 구현했다. 전작은 외부 화면을 흑백으로만 볼 수 있었다. 두께가 퀘스트2보다 40%가량 얇다는 점도 눈에 띈다. 가격도 499달러로 애플의 9분의 1 수준이다. 이 제품의 실물은 오는 9월 ‘커넥트 콘퍼런스’에서 공개된다.

삼성도 퀄컴·구글과 협력해 메타버스 헤드셋을 개발하고 있다. 최근 샘모바일 등 외신은 삼성이 구글, 퀄컴과 함께 개발 중인 XR 기기가 올해 말 출시될 수 있다고 보도했다. 지난 2월 노태문 삼성전자 MX(모바일경험)사업부장(사장)은 갤럭시언팩 행사에서 “퀄컴, 구글과의 협력으로 차세대 XR 폼팩터를 준비하고 있다”고 발표한 바 있다. 3월엔 특허청에 ‘갤럭시 글라스’라는 상표를 출원한 것으로 알려졌다. ‘메타 vs 애플 vs 삼성’ 3강 구도가 형성되는 것이다.

○대중화 가능할까

전문가들은 애플 비전 프로를 계기로 XR 기기 생태계가 활성화될 것으로 전망했다. 다만 아직 시장 규모가 작다는 건 두 회사가 풀어야 할 숙제다. 올해 전 세계 VR 기기 판매량은 약 1000만 대로 관측된다. 아이폰이 매 분기 수천만 대 팔리는 것에 비교하면 적은 수치다. 키움증권은 애플 비전 프로의 내년 출시 첫해 판매량이 100만대 미만이 될 것으로 전망했다. 대만 시장조사업체 트렌드포스의 전망치는 좀 더 어둡다. 올해 AR·VR 헤드셋 출하량이 745만 대로 전년 대비 18.2% 감소할 것으로 봤다. 비전 프로의 내년 출하량도 20만~30만 대 수준으로 전망했다.

키움증권은 최근 보고서를 통해 대중화를 위해 스마트폰과 차별적 활용도, 휴대성 및 디자인, 가격 등에 대한 고민과 혁신이 필요할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번에 공개된 비전 프로는 일반 소비자 대상이 아니라 B2B(기업 간 거래) 또는 콘텐츠 개발자용 제품에 가깝다는 평이다. 보고서는 “2025년 2세대 제품은 헤드셋 형태를 유지하되, B2C(기업과 소비자 간 거래) 시장을 겨냥해 가격을 낮춘 보급형으로 출시하고, 2026년 3세대 제품은 글라스 기반 AR 기기로서 대중화를 시도할 전망”이라고 내다봤다.

최진석 기자 iskr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