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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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주요 상장회사들이 보유한 재고자산이 140조원어치를 웃도는 등 사상 최대로 집계됐다. 재고 대부분이 팔리지 않아 창고에 쌓인 ‘악성 재고’여서 경기 침체를 가속화할 것이란 우려가 나온다. 재고가 어느 정도 소진될 때까지 기업들이 설비투자와 생산을 미루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21일 금융정보업체 에프앤가이드에 따르면 삼성전자 SK하이닉스 현대자동차 LG화학 포스코 등 50대 주요 상장사의 지난 6월 말 연결재무제표 기준 재고자산 규모는 145조1681억원으로 역대 최대인 것으로 집계됐다. 작년 6월 말보다 12%(15조6572억원) 늘었다. 2012년 말 100조원을 넘어선 이들 상장사의 재고자산은 2017년 110조원을 돌파했다. 미·중 무역분쟁이 본격화하면서 수출이 줄어든 지난해부터 증가 속도가 빨라졌다.

재고는 매출이 증가하면 자연스럽게 늘어난다. 하지만 50대 상장사의 올 상반기 매출 합계는 전년 동기 대비 0.3% 감소했다. 매출 감소에도 재고가 급증한 것은 그만큼 제품이 팔리지 않아 생산된 물건이 창고에 쌓인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지난 5월 기준 전체 제조업 재고율(재고/출하)은 117.9%로 1998년 9월(122.9%) 후 최고 수준이다.

'눈덩이' 기업 재고…145兆 사상 최대
재고가 쌓이면서 기업 실적과 설비투자도 악화되고 있다. 에프앤가이드에 따르면 올해 유가증권시장 상장사들의 영업이익 컨센서스(증권사 추정치 평균)는 142조5000억원으로 전년 대비 27.8% 줄어들 것으로 집계됐다. 8월 설비투자 증가율은 -2.7%(전년 동월 대비)로 10개월 연속 마이너스를 기록했다. 이인호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는 “팔리지 않는 ‘악성 재고’가 기업 경영과 생산에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다”며 “재고 처분에 어려움을 겪는 기업들이 생산과 설비투자를 줄일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은행은 경기 부양을 위해 지난 16일 기준금리를 연 1.25%로 0.25%포인트 인하했다. 그러나 재고가 쌓이면서 금리 인하에 따른 투자 확대 효과가 반감될 것이란 우려가 나온다.

외환위기 수준까지 치솟은 제조업 재고율
반도체만 30兆 넘었다


재고 지표는 경기를 반영하는 대표적 ‘리트머스 시험지’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수출 투자 소비 등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파급경로 한복판을 지키고 있기 때문이다. 가령 수출길이 좁아지면 재고가 늘고 기업은 늘어난 재고에 대응해 투자·생산·고용을 줄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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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고 지표는 국내를 대표하는 대기업을 중심으로 빠르게 나빠지고 있다. 올 6월 말 기준 삼성전자(31조2470억원) 현대자동차(12조2097억원) 포스코(11조7082억원) 등 수출 주력 기업의 재고가 10조원을 넘어섰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반도체 업체들은 올 상반기 매출 감소에도 불구하고 재고는 급격하게 늘었다. 삼성전자는 올 상반기 매출이 전년 동기 대비 8.8% 줄었지만 같은 기간 재고는 14.2% 늘었다. SK하이닉스는 상반기 매출이 30.7% 줄었지만 재고는 65.9%나 불었다. 재고 증가율이 매출 증가율을 크게 웃돈 것은 물건이 그만큼 팔리지 않는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재고 합계는 올 6월 말 기준 36조8357억원이다. 두 업체의 재고물량 상당수는 반도체다.

재고가 매출로 반영되는 속도도 더뎌지고 있다. 50대 주요 상장사의 지난해 재고자산 회전율(연간 매출÷재고자산)은 8.66회로 나타났다. 2010년 이후 최저치다. 재고자산 회전율은 2015년 10.16회에 달했지만 2016년 9.51회, 2017년 9.52회로 떨어졌고 지난해에는 8회로 더 내려갔다. 재고자산 회전율은 재고자산이 얼마나 빨리 판매돼 매출로 이어지는가를 나타내는 지표다. 회전율이 낮아진다는 것은 회사의 재고 부담이 커지고 수익률이 나빠진다는 뜻이다.

제품이 잘 팔리지 않아 생산된 물건이 창고에 쌓이는 현상은 국내 주력 상장사는 물론 제조업체 전반으로 확산되고 있다. 제조업 재고율은 지난 5월 117.9%까지 치솟으면서 1998년 9월(122.9%) 후 가장 높았다. 재고율이란 매월 말 기업의 제품 재고를 한 달 동안 시장에 내다 판 제품 출하량으로 나눈 값이다. 재고율이 높다는 것은 제품이 팔리지 않아 재고가 쌓인다는 뜻이다.

이처럼 기업들의 재고가 쌓이는 것은 최근 수출이 급격히 쪼그라들었기 때문이다. 수출액은 지난해 12월부터 올해 10월(1~20일 기준)까지 11개월 연속 감소세다.

김익환/임근호 기자 lovepe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