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 경제를 끌고 나갈 리더십의 실종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올 1분기 마이너스 성장과 5개월 연속 수출 감소, 만성적 고용 불안과 규제 혁파 부진, 반도체경기 하강과 미·중 무역전쟁 등 국내외 악재가 즐비하지만 위기를 책임지고 돌파하려는 컨트롤타워가 없다는 것이다. 주 52시간 근로제 시행 여파로 버스파업이 코앞에 닥칠 때까지 기획재정부를 비롯한 경제부처들이 팔짱만 끼고 있었던 이유다.
< 홍 부총리, 버스노조와 긴급 회동 > 홍남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왼쪽부터)이 버스파업을 이틀 앞둔 13일 정부서울청사에서 김주영 한국노동조합총연맹 위원장, 류근중 전국자동차노동조합연맹 위원장과 만나 대화를 하고 있다.   /강은구 기자 egkang@hankyung.com
< 홍 부총리, 버스노조와 긴급 회동 > 홍남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왼쪽부터)이 버스파업을 이틀 앞둔 13일 정부서울청사에서 김주영 한국노동조합총연맹 위원장, 류근중 전국자동차노동조합연맹 위원장과 만나 대화를 하고 있다. /강은구 기자 egkang@hankyung.com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해 12월 홍남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을 임명하면서 ‘경제 원톱’이라고 불렀다. 5개월이 지났지만 “홍 부총리가 보이지 않는다”는 게 경제계의 냉혹한 평가다. 경제 현안마다 여당 지도부와 청와대 참모들의 거친 목소리가 조율 없이 흘러나와 국민을 더 혼란스럽게 한다는 지적이다.

이 같은 사례는 셀 수 없을 정도다. 홍 부총리는 지난 3월 “추가경정예산 편성은 검토하지 않고 있다”고 했지만 문 대통령이 지시하자 곧바로 추경 편성에 들어갔다. 증권거래세 인하도 똑같았다. “밀도 있게 검토하지 않는다”더니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인하할 필요가 있다”고 하자 0.05%포인트를 낮췄다.

대한민국 '경제 리더십'이 안 보인다
나랏돈이 투입되는 대형 사업의 경제성을 미리 따져보는 예비타당성 조사 담당 부서인 기재부 타당성심사과는 요즘 정부 안팎에서 ‘예타면제과’로 불린다. 올초 청와대와 여당 주도로 새만금국제공항 등 23개 사업(사업비 24조원)의 예타가 면제된 뒤부터다.

“혈세 낭비를 막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란 기재부의 반발이 “지역 균형발전이 우선”이라는 정치논리에 밀리면서 나라 곳간을 책임지는 ‘마지막 보루’는 비아냥의 대상이 됐다. 이인실 서강대 경제대학원 교수는 “무너진 기재부의 위상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면”이라고 했다.

홍 부총리가 올 3월 혁신성장을 위해 적극 육성하겠다고 밝힌 ‘4대 플랫폼 사업’(수소경제, 빅데이터, 인공지능, 5G 이동통신)은 청와대의 ‘3대 중점 육성 산업’(시스템 반도체, 바이오헬스, 미래 자동차)에 묻혔고 관련 업체들은 혼란에 빠졌다.

유경준 한국기술교육대 교수(전 통계청장)는 “기재부가 경제 컨트롤타워 지위를 되찾으려면 현 경제상황의 심각성을 있는 그대로 국민에게 알리고 이에 맞는 처방을 내놔야 한다”며 “표를 위해 선심성 재정정책을 쓰려는 당·청에 브레이크를 거는 것도 기재부의 임무”라고 지적했다.

말로만 '홍남기 경제 원톱'…권한도 책임도 안주고 정책결정 땐 '패싱'

홍남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명실상부한 ‘경제 사령탑’으로 인정받기 위해선 ‘넘어야 할 산’이 많다. 청와대와 여당의 주문을 그대로 수행하는 ‘단순 전달자’가 돼선 경제 리더십을 구축할 수 없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국가 경제의 미래를 위해 필요하다면 청와대와 여당을 설득하는 강단을 보여야 한다는 얘기다. 하지만 홍 부총리를 둘러싼 상황은 녹록지 않다. 관료를 기득권으로 보는 진보 정부 특유의 ‘관료 불신’ 성향을 이겨내고, 정치권 실세로 구성된 경제부처 장관들을 이끌고 나가는 게 ‘늘공’(늘 공무원·직업 관료)인 홍 부총리에겐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서로 다른 목소리를 내는 각종 위원회와 힘 있는 여당 지방자치단체장도 홍 부총리에겐 버거운 상대다.

(1) 거센 黨·靑 '입김' - "정부 부처는 당·청 결정 실행하는 하급기관 전락"

홍 부총리가 ‘경제 컨트롤타워 역할을 못 한다’는 비판을 받는 것은 상대적으로 경제정책을 결정할 때 여당과 청와대가 차지하는 비중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최근 들어 공무원 사회에서 “주요 정책은 당·청에서 결정하고 정부 부처는 이를 실행하는 ‘하급 기관’으로 전락했다”는 푸념이 나오는 배경이다.

지난 3월 더불어민주당 주도로 택시·카풀 사회적 대타협 기구가 합의안을 내놓은 게 대표적이다. 홍 부총리는 취임 초부터 승차 공유 규제를 대폭 풀어야 한다는 의견이었다. 하지만 택시기사 표를 의식한 여당은 홍 부총리를 뺀 채 국토교통부, 카풀업체, 택시업체와 머리를 맞대고 카풀 허용 시간을 오전 7~9시, 오후 6~8시로 제한하고 주말·공휴일은 금지하는 내용의 ‘반쪽짜리 합의안’을 도출했다. 카풀업계에선 “카풀 허용 시간이 지금보다 오히려 줄어든 개악”이라고 반발했다. 기재부가 개입하기엔 시간이 너무 흐른 뒤였다.

지난달 발표한 추가경정예산안 편성 과정도 비슷했다. 홍 부총리는 3월 한 언론 인터뷰에서 “추경 편성을 검토하지 않고 있다”고 했지만 인터뷰가 나간 당일 문재인 대통령은 “추경을 긴급 편성해서라도 미세먼지를 줄여야 한다”고 말했다. 관가에서는 “홍 부총리가 주요 정책 결정 과정에서 소외된 것 아니냐”는 반응이 나왔다.

(2) 진보정권의 관료 불신 - 靑에 반대 의견 내비치면 "보수色 안빠졌군요"

상당수 공무원은 최근 당·청이 정책 결정을 틀어쥐려는 이유에 대해 “진보정권의 뿌리 깊은 관료 불신 때문”이란 해석을 내놨다. 이인영 민주당 원내대표와 김수현 청와대 정책실장이 지난 10일 “관료가 말을 덜 듣는다” “김현미 (국토부) 장관이 한 달 없는 사이 자기들(국토부 공무원)끼리 이상한 짓을 많이 해…”라고 말한 사실이 공개되면서 이런 인식은 공무원 사회에 더욱 퍼지고 있다.

이런 사례는 또 있다.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은 과거 한성대 교수 시절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가 경제 개혁에 실패한 건 관료의 보수성 때문”이라고 말했다.

한 경제부처의 고위공무원은 “청와대는 관료들이 이명박·박근혜 정부를 거치는 동안 ‘의식이 보수화됐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며 “청와대 주장에 반대 의견을 내비치면 ‘아직 그쪽 물이 안 빠졌군요’라는 식으로 반응한다”고 설명했다.

현 정부가 장관 인사청문회 때마다 곤욕을 치르는 것도 관료 불신 때문이란 지적이 있다. 관료를 배제한 채 대선 캠프 출신이나 노무현 정부 사람 등 한정된 풀에서 뽑다 보니 ‘인사 참사’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홍 부총리도 노무현 정부 때 청와대 행정관 및 정책보좌관으로 3년간 일했다.

(3) 넘쳐나는 실세 장관 - 정치인 장관들 내각에 포진…경제부총리 위축

홍 부총리가 작년 11월 경제부총리 후보자로 내정됐을 때 김수현 청와대 정책실장과의 관계에서 밀릴 것을 걱정하는 시각이 많았다. 김 실장과 홍 부총리는 노무현 정부 때 청와대에서 함께 근무했는데 김 실장은 당시에도 정권 실세로 통했기 때문이다. 홍 부총리는 “김 실장과 팀워크를 발휘해 원팀이 되는 작업을 하겠다”고 했지만 일각에선 “원팀이라는 게 결국 청와대 의중을 거스르지 않겠다는 것 아니냐”는 비판이 나왔다.

정치권에서 건너온 실세 장관들 때문에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얘기도 들린다. 김현미 장관, 박영선 중소벤처기업부 장관, 진영 행정안전부 장관, 이개호 농림축산식품부 장관 등 여당 의원이 내각에 포진해 있는 데다 대선 캠프에서 활동한 김상조 위원장도 둥지를 틀고 있어서다.

행정고시 선배 장관들도 홍 부총리에게는 부담이다. 1960년생인 홍 부총리는 행시 29회다. 경제부처 내에서 최종구 금융위원장(1957년생·25회), 이재갑 고용노동부 장관(1958년생·26회) 등보다 어리고 행시 기수도 후배다.

(4) 정부 위원회만 558개 - 사회적 타협기구·위원회·시민단체 각종 훈수

기재부가 경제정책에 대한 책임과 권한을 가졌던 과거와 달리 각종 사회적 타협 기구와 정부 위원회에서 주요 정책이 결정되는 것도 홍 부총리의 입지를 좁게 하는 원인 중 하나다. 사회적 타협 기구는 ‘이해 당사자 간 합의’, 위원회는 ‘전문가 토론을 거친 결론’이란 모양새를 띠지만 책임 소재를 가리기가 어렵다는 단점이 있다. 그럼에도 정책 결정에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정치권과 책임을 지지 않으려는 관료들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며 우후죽순으로 생기고 있다.

현 정부 들어 위원회는 558개까지 불어났다. 대통령 직속 위원회만 해도 일자리위원회, 북방경제협력위원회, 4차산업혁명위원회 등 5개가 새로 생겼다. 노무현 정부 시절 579개였던 위원회가 이명박 정부 때 431개까지 줄었지만 박근혜 정부와 현 정부를 거치며 계속 늘어나는 추세다.

양대 노총과 참여연대 등 시민단체의 힘이 세진 것도 부담이다. 참여연대는 현 정부 출범 직후 경제부처 장관 후보로 거론되는 특정 인사의 실명을 내세워 내각 인선에서 배제하라는 요구를 하기도 했다. 실제로 해당 인사들은 장관이 되지 못했다.

(5) 견제 안되는 지자체장 - 문재인 정부, 지방 강조…'포퓰리즘 경쟁' 견제 못해

지방자치를 중요시하는 정권 기조 때문에 부총리와 중앙정부 역할이 줄어들 수밖에 없다는 의견도 있다. 지자체장들이 ‘복지 경쟁’을 펼치고 있지만 재정건전성을 책임져야 하는 홍 부총리와 기재부가 별다른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이유기도 하다.

이재명 경기지사가 시작한 ‘청년기본소득’이 대표적이다. 도 내 3년 이상 거주한 만 24세 청년 모두에게 연 최대 100만원의 지역 화폐를 지급하는 이 사업은 청년수당(서울시), 청년구직활동수당(경상남도), 청년구직지원수당(전라남도) 등 다른 지자체가 앞다퉈 따라하고 있다. 관가에선 “광역자치단체장 17명 중 14명이 여당 소속이기 때문에 홍 부총리가 이들을 견제하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이 나온다.

오상헌/이태훈/성수영/박재원 기자 ohyea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