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이 여기저기 중첩된대도 전부 따로 공시하라니 답답하죠. 공시 담당자들 아니면 누가 읽기는 할는지….”

한 대기업 기업설명 담당 관계자는 “‘공시를 위한 공시’가 점점 늘어나는 것 같다”며 이렇게 토로했다. 각기 다른 공시 제도가 쏟아지면서 기업의 업무 부담이 급증하고, 투자자들의 정보 열람 집중도는 되레 떨어지고 있다는 속앓이다.

올 들어 기업에 새로 적용되는 대표적 공시는 기업가치 제고 계획 공시(밸류업 공시)다. 자율 원칙이지만 기본적으로 상장사 전부가 대상이다. 자산 규모가 5000억원 이상인 유가증권시장 상장사라면 올해부터 지배구조보고서 공시 의무도 발생한다. 내년부터는 자산 2조원 이상인 유가증권시장 상장사에 지속가능경영보고서가 의무화된다.

공시 종류만 늘어나는 게 아니다. 내용도 그렇다. 도입 초기였던 2017년 30개였던 기업지배구조보고서 필수기재 사항은 지난해까지 60개로 두 배가 됐다. 이렇다 보니 유가증권시장 시가총액 상위 5개사가 작년 공시한 기업지배구조보고서 분량은 총 513쪽이다. 기업당 평균 100쪽이 넘는다. 이들이 ESG(환경·사회·지배구조) 내용을 담아 알리는 지속가능경영보고서는 평균 분량이 128쪽에 달한다.

여기에다 2026년 이후엔 ESG 공시(지속가능성 공시 기준)가 도입된다. 기업들이 지속가능경영보고서를 통해 알리는 내용 일부에 더해 보다 자세한 ESG 정보를 기재해야 한다. 정부는 이 공시 제도가 도입되더라도 2030년부터 모든 유가증권시장 상장사에 지속가능경영보고서를 의무화할 방침이다. ‘대체가 아니라 추가’가 기본 기조란 얘기다.

밸류업 공시도 그렇다. 기존 사업보고서, 지배구조보고서, 지속가능성경영보고서 등에 들어간 내용을 재배열해 넣고 미래 계획을 추가하는 게 주요 내용이다. 기존 보고서는 도통 투자자들이 읽지 않는다는 게 정부가 거론한 밸류업 공시 도입 이유 중 하나다.

중복 내용이 많다고 해서 기업들이 무작정 ‘복사해 붙여넣기’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공시 형식이 들쭉날쭉한 탓에 같은 내용도 여러 갈래로 나누고 변주해 써야 하는 경우가 많아서다. 이런 공시를 읽는 투자자들의 피로도가 높아지는 것은 당연지사다. 공시 주목도와 유용성도 떨어질 수밖에 없다.

기업 공시의 목적은 공시 행위 자체가 아니다. 투자자나 이해관계자가 기업을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다. 무작정 공시 가짓수를 늘려 정보의 홍수를 만드는 게 기업 이해도를 끌어올리는 데 과연 얼마나 도움이 될까. 전문가들은 투자자를 위하는 공시란 구호가 공허해지지 않도록 제도 정비에 나서야 할 때라고 입을 모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