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합 방식 재건축의 대안으로 주목받던 부동산신탁 방식 재건축이 삐걱대고 있다. 이른바 프로젝트파이낸싱(PF) 부실로 신탁사 실적이 악화한 데다 공사비 상승과 금리 인상 등이 겹치며 재건축 참여를 꺼리는 업체도 늘고 있다. 신탁사가 선별 수주로 돌아서면서 선택지가 좁아진 일부 재건축 사업도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다.

업황 악화에 ‘선별 수주’ 강화

공사비 갈등에…신탁방식 재건축도 '빨간불'
8일 정비업계에 따르면 서울 금천구 남서울럭키아파트는 최근 새로운 신탁사를 찾기 위해 5개 업체에 참가를 요청했다. 하지만 4곳이 거절 의사를 밝혔다.

1982년 준공된 이 단지는 982가구의 대단지다. 지난해 3월 신탁사 3곳이 마지막까지 수주전을 펼칠 정도로 경쟁이 치열했다. 결국 한국자산신탁이 예비신탁사로 선정됐으나 치솟은 공사비와 낮은 사업성이 발목을 잡았다. 결국 주민은 계약 해지를 결정했다. 추정 공사비가 3.3㎡당 950만원에 달해 가구당 예상 분담금이 최대 8억8000만원에 육박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전 경쟁에 나섰던 신탁사들이 이번에는 발을 빼고 있다. 지난해보다 공사비가 오른 데다 사업성이 더 악화했다는 이유에서다. 정비업계 관계자는 “신탁사들이 선별 수주 전략에 따라 입지가 더 좋은 소규모 재건축을 선호하고 있다”며 “지난해처럼 대규모 수주전은 앞으로 보기 힘들 것”이라고 말했다.

사정은 다른 재건축 추진 단지도 비슷하다. 노원구 상계한신3차는 지난해 여러 신탁사가 현장 설명회를 열며 수주전에 나섰다. 신탁사가 도중에 수주전을 포기해 교보자산신탁과 최근 양해각서(MOU)를 체결했다. 양천구 신정동 ‘목동13단지’도 재건축준비위원회가 예비신탁사 선정 입찰을 추진 중이다. 대신자산신탁 한 곳만 참여했다. 신탁업계 관계자는 “과거에는 수수료율이 3%대로 높았고 사업 전망도 밝았다”며 “최근에는 내부적으로 사업성이 좋은 일부 재건축 단지가 아니면 일단 관망하자는 의견이 강하다”고 설명했다.

‘통합 재건축’ 등 활로 모색

신탁 방식 정비사업은 인허가나 시공사 계약 과정에서 전문성이 부족한 조합을 대신해 신탁사가 나서기 때문에 협상력이 비교적 높다는 평가를 받는다. 정부도 신탁방식 재건축에 인허가 절차 단축 등 인센티브를 제공해 지난해에만 36개 현장이 신탁사를 선정하는 등 업계가 호황을 맞았다.

그러나 공사비 상승 등에 따른 재건축 사업성 악화로 신탁사의 영업이익은 크게 줄었다. 한국신용평가에 따르면 지난해 상위 14개 부동산신탁사의 잠정 영업이익은 모두 3579억원으로 2022년(8519억원)에 비해 58% 감소했다. 지난해 4분기만 놓고 보면 KB부동산신탁과 교보자산신탁, 우리자산신탁 등은 마이너스 영업이익을 기록했다.

재건축 과정에서 발생하는 각종 문제에 신탁사가 큰 역할을 하지 못하면서 계약 해지를 추진하는 곳도 생기고 있다. 한 신탁사 수주 담당은 “신탁 계약 해지 요건이 쉬워진 것도 수익성 계산에서 리스크를 크게 높였다”며 “향후 수주에도 어려워진 사업 환경이 반영되는 분위기”라고 했다.

주민들은 시공사나 지방자치단체와의 협상력 강화를 위해 신탁 방식을 여전히 선호하는 분위기다. 특히 노후계획도시 특별법이 적용되는 수도권 1기 신도시 등을 중심으로 일찌감치 신탁 방식 재건축 설명회가 활발하다. 1기 신도시는 여러 단지를 묶는 통합 재건축 방식을 추진 중이어서 그만큼 이해관계가 복잡한데, 주민 입장에선 신탁 방식이 속도를 높일 수 있기 때문이다. 신탁사 역시 대규모 단지를 맡으면 그만큼 수익 확보에 유리하다.

경기 성남시 매화마을·목련마을을 비롯해 ‘분당 파크타운’, 광명 ‘하안주공 3·4단지’ 등은 신탁 방식 재건축 추진을 위한 현장 설명회를 열었다. 정비업계 관계자는 “1기 신도시 재건축 단지는 규모가 커 신탁사가 컨소시엄 형태로 참여해도 수익성 확보가 가능할 전망”이라며 “신탁사와 주민에게 좋은 선택이 될 수 있다”고 조언했다.

유오상 기자 osy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