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토쓰바시대 사회학부 학생들의 한일 근대사 공부 이야기
신간 '우리가 모르는 건 슬픔이 됩니다'
K팝 스타 '덕질'하고, 韓 소설 읽다 한일史에 눈뜬 日 학생들
일본 만화에서 유난히 많이 나오는 소재가 있다.

'각성'(覺醒)이다.

'드래곤볼', '헌터×헌터' 등 고전 만화뿐 아니라 '체인소맨', '주술회전' 등 최근 나오는 만화들에서 대부분의 주인공은 각성을 통해 '레벨업'한다.

만화를 보고 자란 일본 청년들도 때론 각성한다.

K팝 골수팬이었던 대학생 구마노 고에이도 그런 경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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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한국문화에 빠진 계기는 입시를 얼마 남겨두지 않았던 고3 때였다.

그는 공부 중 잠깐 머리를 식히고자 유튜브 창을 열다가 운명처럼 방탄소년단(BTS)과 트와이스의 뮤직비디오를 보고 말았다.

탁월한 춤 실력과 빠른 장면 전환, 아이돌의 눈부신 비주얼. 충격에 빠진 그는 단숨에 한국 대중문화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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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덕질'은 대학 입학 후 본격화했다.

영화·드라마·대중음악 등 이른바 한국산이라면 사족을 못 썼다.

급기야 제2외국어로 한국어를 선택하며 한국어 공부까지 매진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학교에서 진행하는 한국 투어에 참여했고, 들뜬 채로 한국에 왔으며, 그곳에서 재일조선인 학생 A를 만났다.

"나는 주변에서 케이팝을 좋아한다는 사람을 봐도 심드렁해. 역사는 보지 않고 즐거움만 취하는 건 문화소비일 뿐이잖아."
이어 A는 일본인 대부분이 일본의 가해 역사는 회피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선뜻 와닿지 않았다.

하지만 내적으로 동요했다.

A의 지적이 그의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찜찜한 그 무언가가 그를 옥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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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혼란에서 빠져나오고자 한일 근대사를 열심히 뒤적였고, 일본군 위안부, 군함도 등 몰랐던 역사적 사실을 알게 됐다.

그리고 "일본군 위안부 제도와 같은 과거의 불의를 발생시킨 '차별과 배제의 구조'가 남아있는 한, 현대인에게는 역사를 풍화시키지 않고 차별과 배제의 구조를 무너뜨릴 책임이 있다"는 호주 역사학자 테사 모리스 스즈키의 주장에 점점 공감하게 됐다.

무엇보다 히토쓰바시대 사회학부 선후배 동료들과 과거사에 대한 여러 이야기를 나누면서 미몽(迷夢)에서 점차 벗어날 수 있었다.

각성의 순간들은 그렇게 시차를 두며 그를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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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출간된 '우리가 모르는 건 슬픔이 됩니다'는 일본이 왜곡한 한일 근대사를 마주한 일본인 대학생들의 고민과 역사 공부를 통해 깨달은 각성을 담은 책이다.

가토 세이키 히토쓰바시대 교수가 진행한 세미나에 참석한 사회학부 대학생들이 이 책의 저자다.

고교 때까지 세계사를 열심히 공부했다고 자부한 오키타 마이는 대학에 와서 '조선의 역사와 문화' 강의를 들으며 조선 식민지의 현실에 눈을 떴다.

아사쿠라 기미카는 한국 화장품과 잡화를 좋아하다가, 소설 '82년생 김지영'을 읽고 본격적으로 한국 사회와 한일 근대사에 관심을 가졌다.

해외에 갈 수 있는 데다 영어를 써볼 수 있다는 점에 끌려 한국 대학생과 교류하는 단체에 들어간 우시키 미쿠는 한국 학생들과 논쟁하는 과정에서 일본군 위안부의 진실을 알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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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마다 각성의 계기는 달랐지만, 이들은 일본군 위안부, 강제징용, 독도 영유권 분쟁 등을 공부하면서 일본이 '관용이 넘치는 상냥하고 친절한 나라'도, '문화를 받아들이며 진보해 온, 세계에 자랑할 만한 나라'도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이로 인해 내적 갈등도 겪었지만, 적어도 피해자 '인권'에 더 신경 써야 한다는 사실만은 분명히 깨달았다고 한다.

"내가 '과거의 일'이라고 생각했던 역사 문제가 실제로는 끝난 적이 없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아직 식민지 지배를 당한 조선인들을 이해하기에는 멀었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그들을 생각하는 일, 그리고 절대적 가치로서 지켜야만 하는 '인권'을 이해하는 노력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안다.

"(우시키 미쿠)
해피북스투유. 244쪽. 김혜영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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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