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도심에서 주상복합아파트 사업을 추진 중인 A시행사는 최근 토지 매입 작업을 중단했다. 토지 잔금 수백억원을 마련하기 위해 초기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 형태인 브리지론 대출을 금융회사에 타진했지만, 검토조차 해주는 곳이 없었다. 금융당국이 PF 부실 관리를 위해 대손충당금을 쌓으라고 요구하는 마당에 신규 대출은 엄두도 못 내고 있어서다. 업계 관계자는 “사업성이 있는지는 고려 대상도 아니다”며 “강남 한복판에 있는 땅도, 10대 건설사가 참여하는 사업도 개발이 멈췄다”고 말했다.

○PF 4분의 1토막…“하반기가 더 문제”

강남 사업장도 '돈맥경화'…"2~3년 뒤 역대급 주택 공급난 올 것"
부동산금융 시장에 역대급 한파가 불고 있다. 지난해에는 고리대금 수준의 금리에 돈을 빌린 사업장의 이자 부담이 눈덩이처럼 커졌다면, 올해 들어서는 그마저도 끊어져 공매의 갈림길에 서 있다. 자금경색 여파는 수도권 외곽을 넘어 서울 중심부까지, 비주택을 넘어 아파트까지 미치고 있다.

4일 업계에 따르면 올 1분기 자금을 조달한 신규 브리지론은 서울 성수동 ‘크래프톤 타운 업무시설 개발사업’ 한 건이다. 게임 개발업체 크래프톤이 80%를 선임차하는 사업인 점을 감안하면 신규 브리지론 시장이 ‘실종됐다’는 평가가 나온다.

10대 건설사가 올해 새로 추진한 주택사업(신규 브리지론 기준)은 단 한 건도 없다. 기존에 땅 작업이 끝나 본PF를 조달한 사업도 시장 수요에 비해 턱없이 부족하다. 1분기 이뤄진 공동주택 PF는 5건, 1조3100억원 규모다. 오피스텔, 도시형생활주택 등 비아파트 가운데 PF가 이뤄진 곳은 한 건도 없다. 한 대형 건설사 관계자는 “10대 건설사조차 브리지의 ‘브’자도 못 꺼내는 분위기”라며 “미룰 때까지 미룬 사업만 간신히 진행되고 있다”고 말했다.

신규 주택사업이 멈추면 2~3년 후 입주 대란으로 이어진다. LH(한국토지주택공사)가 건설사와 시행사에 공공택지 용지를 매각한 뒤 받지 못한 연체 금액은 1월 기준 1조5190억원에 달한다. 민간 사업까지 고려하면 생사의 갈림길에 선 아파트 사업은 훨씬 늘어난다.

법정 상한이자 연 20%를 웃도는 계약이 많아 자금을 조달한 사업장도 분양까지 정상적으로 추진될지 장담할 수 없다. 업계 관계자는 “올해 1분기 PF 시장만 놓고 봐도 예년의 4분의 1토막 났다”며 “업계에선 총선 후 시행사의 줄부도를 기정사실화하고 있다”고 말했다.

○“후진 금융에 멀쩡한 사업장도 도산”

업계에서 우려하는 것은 서울 중심지 아파트와 오피스 등 수요가 충분한 사업장마저 ‘돈맥경화’로 부실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역삼동 강남역 인근의 한 오피스 개발 부지(2040㎡)는 지난달 공매(감정가 2308억원)로 나왔다. 막판에 자금을 조달해 개시 전 공매가 취소됐지만 언제 금융 문제가 불거질지 모른다는 게 중론이다.

4000억원 규모 브리지론을 받은 서초구의 한 고급주택 사업도 일부 채권단이 땅을 팔아 대출금을 상환할 것을 주장하면서 사업이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다. 한 금융사 관계자는 “사업성과 관계없이 2회 이상 연장된 브리지론은 충당금을 설정하도록 하면서 혈관이 다 막혔다”며 “출구전략 없이 고금리로 현장을 유지하다 보니 멀쩡한 시행사도 고사 위기에 놓였다”고 말했다.

한국자산관리공사 온비드에 따르면 올 들어 이날까지 개찰이 진행된 신탁사의 토지(대지) 매각 공매는 914건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356건)보다 2.6배로 늘었다. 올해 공매 물건의 낙찰비율은 1.5%(14건) 수준이다. 공매로 넘어간 사업장은 ‘반값’에도 매수자가 나타나지 않고 있다. 2월 공매로 나온 서초구 서초동의 한 토지는 여덟 차례 유찰됐다. 최소 입찰금액이 1030억원에서 537억원으로 낮아졌다. 한 시행사 대표는 “최근 금융당국이 원금의 30%만 건져도 공매를 강행하라는 지침을 내렸다”며 “부동산금융 시장이 망가진 틈을 타 선순위 채권자와 짜고 고의 부도를 일으키는 외국계 펀드까지 등장했다”고 말했다.

이유정 기자 yj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