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소비자 분쟁시엔 절차 강제 시작…의료분쟁은 '중대 사고'에만 적용
환자단체 "소송 원하는 환자 없어…모든 의료사고에 조정 허용해야"
의사들 '법적부담 완화' 주장…환자들 "소송 없이 피해 구제받을수 있어야"
'의사 거부'에…의료사고 분쟁조정 신청해도 40%는 시작도 못해
의료 사고로 인한 환자와 의료진의 갈등이 소송으로 확대되는 것을 예방하기 위해 '의료분쟁 조정 제도'가 시행 중이지만, 신청된 조정의 40%는 절차를 시작하지도 못하고 종료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의료기관이 조정을 거부하기 때문인데, 피신청인이 동의하지 않더라도 조정 신청을 개시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 작년 의료분쟁 조정 각하율 38.9%…"병원 측 거부 때문"
19일 한국의료분쟁조정중재원의 의료분쟁조정·중재 통계연보에 따르면 작년에 2천51건의 조정이 신청됐고 이 중 645건이 각하됐다.

각하란 조정 절차를 시작하지 않고 종료하는 것을 말한다.

의료분쟁조정법에 따르면 조정 신청이 접수되면 의료분쟁조정원은 피신청인에게 조정 절차에 응할 것인지를 묻고, 피신청인이 14일 이내에 동의 의사를 밝히지 않으면 신청은 각하된다.

일명 '신해철법'이 2016년 11월부터 시행된 이후 의료행위로 인해 환자가 사망하거나 1개월 이상 의식불명, 중증 장애인이 되면 자동으로 조정 절차가 개시된다.

하지만 이런 경우가 아니라면 피신청인이 동의해야만 조정 절차가 시작되기 때문에 제도를 통해 환자가 피해를 구제받기 어렵다는 문제가 있다.

작년에 자동 개시된 조정 391건을 제외하면 일반 개시 조정(1천660건) 사례 중 645건이 각하돼 각하율은 38.9%나 됐다.

조정 신청을 한 환자 10명 중 4명이 의료 사고를 겪고도 의사 등의 반대로 분쟁 조정 절차를 밟지 못한 셈이다.

의료분쟁조정원 관계자는 "간혹 피신청인이 환자인 경우도 있지만 병원 측의 거부로 조정 절차가 각하되는 경우가 거의 다라고 보면 된다"고 말했다.

'의사 거부'에…의료사고 분쟁조정 신청해도 40%는 시작도 못해
◇ 언론중재·소비자분쟁 등 대부분 분야선 조정 강제 개시
의료분쟁조정과 달리 대부분의 분쟁 조정 제도는 조정 신청이 접수되면 자동으로 절차가 개시된다.

피해를 신속히 구제해 갈등이 소송으로 확대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서다.

언론중재위원회, 소비자분쟁조정위원회, 환경분쟁조정위원회, 개인정보분쟁조정위원회, 전자거래분쟁조정위원회, 건설분쟁조정위원회 등 각 분야의 분쟁 조정위원회는 피신청인의 의사를 묻지 않고 조정이 신청되면 자동으로 절차를 개시한다.

의료분쟁조정은 당초 모든 조정에 대해 갈등 당사자 쌍방이 동의할 때 절차를 개시할 수 있다고 했다가, 신해철법 시행으로 의료사고의 결과가 중대한 경우에만 강제로 절차를 시작하도록 하는 '자동개시절차'를 도입했다.

다만 이와 관련해 법조계에서는 피해가 큰 의료사고에 대해서는 조정 절차를 강제로 개시토록 하면서, 그보다 경미한 사건의 경우엔 양 당사자의 동의가 필요하다는 것은 논리적 모순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박영호 수원지방법원 부장판사는 2021년 격월간 학술저널 '저스티스'에 게재한 논문 '환자와 의사 간 의료분쟁의 원만한 해결'에서 "대부분의 조정 관련 법률에서 사건의 범위를 제한하지 않고 있는 마당에, 굳이 의료분쟁조정법에서만 자동 개시의 범위를 가장 분쟁이 심한 사안에만 제한하는 것은 다소 이해하기 어려운 조치"라고 밝혔다.

'의사 거부'에…의료사고 분쟁조정 신청해도 40%는 시작도 못해
◇ 의협 "처벌 부담에 필수의료 기피"…환자단체 "분쟁조정 개시 확대해야"
의료기관이 분쟁 조정을 거부하면 환자는 피해를 구제받기 위해 법적 다툼을 벌일 수밖에 없다.

의사단체는 오히려 불가항력적인 의료사고에도 의사들이 법적 처벌을 부담하게 돼 필수의료와 적극적인 의료행위를 거부하는 상황에 놓였다며, 의료행위 결과에 대한 법적 부담을 완화해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대한의사협회는 지난 13일 '선한 사마리아인법 국회 통과 촉구'라는 제목의 자료를 내고 "한국은 의료사고 발생 시 의사에 대한 형사 기소율과 유죄율이 외국에 비해 비정상적으로 높아 필수의료 기피 현상은 더욱 심화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대검찰청의 '2022 범죄분석' 자료에 의하면 2021년 업무상과실치사상죄로 검찰에 입건·송치된 의사는 645명이다.

법원의 '2023 사법연감'에 따르면 작년에 과실치사상죄로 형사재판 1심 판결을 받은 사람은 1천297명이고, 이중 약 7%인 90명이 징역, 금고, 구류 등 자유형을 선고받았다.

한 달에 7.5명 수준에 불과하다.

집행유예는 580명, 재산형 389명, 선고유예 22명, 무죄 98명, 공소기각 44명 등이었다.

민사소송의 원고(환자) 승소율은 매우 낮다.

2021년에 처리된 의료과오 민사소송은 879건이고, 이중 원고 전부 승소는 6건(0.68%)에 불과했다.

'의사 거부'에…의료사고 분쟁조정 신청해도 40%는 시작도 못해
정부는 의대증원을 추진하면서 '의료계 달래기' 대책 중 하나로 의료사고에 대한 의사의 법적 부담을 완화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보건복지부는 법조계, 의료계, 소비자단체가 참여하는 '의료분쟁 제도개선 협의체'를 구성하고 지난 2일 첫 회의를 열어 각 단체의 의견을 들었다.

환자단체 등은 의료사고의 직접적 피해자인 환자가 소송을 하지 않고도 피해를 구제받을 수 있는 방안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한국환자단체연합회 관계자는 "의료사고가 발생했을 때 소송까지 가길 바라는 환자는 없다"며 "모든 의료 사고에 대해 분쟁 조정을 받을 수 있도록 조정절차 자동 개시 범위를 확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