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어트약' 처방을 위해 오픈런을 한 사람들. /사진=김세린 기자
'다이어트약' 처방을 위해 오픈런을 한 사람들. /사진=김세린 기자
"'다이어트약'을 먹고 체중 감량에 성공했지만, 결론적으로 좋지 않은 선택을 한 것 같습니다."

직장인 박모 씨(34)는 결혼식을 위해 식욕억제제와 체지방이 연소하는 의약품 등을 포함한 '다이어트약'을 처방받았다. 당시 급하게 체중 감량이 필요했다는 박씨는 "인터넷 후기를 찾아보니 단기간에 살 빼는 데엔 제일 효과가 좋다고 해서 처방받았다"며 "부작용도 많고 안 좋다는 소리도 많이 들었지만, 분명 효과가 있었다"고 말했다.

문제는 결혼식 이후에 벌어졌다. 다이어트약을 중단하니 체중이 늘어나고, 약에 의존하는 성향이 생기게 된 것. 박씨는 "(약을) 끊고 나니 식욕이 폭발했고, 못 끊겠다는 느낌을 받았다"며 "의사의 주의사항을 잘 들었음에도 급한 마음에 약을 먹었던 것 같아 후회했다"고 털어놨다.

정부가 '향정신성의약품(마약류)'에 해당하는 다이어트약의 오남용 문제에 대한 우려를 표했음에도 체중 감량을 위해 이를 찾는 사람들은 여전한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 5월 식품의약품안전처와 보건복지부는 "'다이어트약 오픈런'으로 논란이 된 5개 의료기관을 합동점검 한 결과, 모든 기관이 마약류인 식욕억제제 과다처방 사례를 확인했다"고 밝혔다.
기자도 '다이어트약 오픈런' 체험을 위해 3시간 가량 대기해 진료를 받았다. /사진=김세린 기자
기자도 '다이어트약 오픈런' 체험을 위해 3시간 가량 대기해 진료를 받았다. /사진=김세린 기자
1일 방문한 서울 구로구 신도림의 한 의료기관은 오전 10시 문을 열기 전부터 20명가량이 긴 대기 줄을 서 있었다. 이곳은 온라인상에서 '다이어트 3대 성지'로 불리며 '오픈런'이 필수적인 곳으로 알려져 있다. 병원 인근 카페의 직원은 "거의 매일 병원 앞에 사람들이 줄을 서 있다고 보면 된다"며 "전날이나 새벽부터 와서 노숙하며 대기하는 분들까지 있을 정도"라고 전했다.

이 병원은 '탄수화물 중독, 스트레스성 폭식 전문병원'이라거나, '비만은 질병이다. 이제 상담 후 병원에서 치료해라'라는 문구를 내걸고 식욕억제제 등을 홍보했다. 식욕억제제는 향정신성 의약품에 해당해 의존성이나 내성을 유발하며, 각종 신체적·정신적 부작용을 일으킬 수 있다. 과량으로 먹을 경우 불안과 의식 잃음, 사지 떨림, 호흡 빨라짐, 혼란, 환각 상태, 공격성, 공포로 인해 갑작스러운 심리적 불안 상태가 나타날 수 있고, 중독되면 경련, 혼수상태 및 사망에 이를 수 있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기자도 오픈런 후 약 3시간의 기다림 끝에 진료를 볼 수 있었다. 진료에 앞서 간단한 설문조사와 함께 키와 몸무게를 측정했다. 기자는 비만치료지침 기준이 되는 신체질량지수(BMI)가 16.19로 저체중에 해당한다. 대만비만학회에 따르면 BMI 지수 18.5부터 23까지 정상, 23을 넘어가면 과체중, 25부터 비만으로 분류한다. 하지만 다이어트약 처방에 제재나 우려는 없었다.

담당 의사는 "체중을 고려해 마약류 다이어트약은 처방하지 않겠다"고 하긴 했지만, "마약류가 아닌 다른 약은 부작용이 없냐"고 묻자, "이 역시 부작용이 있다"고 답했다. 이어 안내문을 읽어주며 주의사항을 설명했고, 진료는 5분 내외로 종료됐다.

이후 간호사는 "약을 처음 드시는 거라 손 떨림 등 부작용이 나타날 수 있으나 일주일이 지나면 금방 없어진다"며 처방전을 건넸다. 이날 4주 치 다이어트약을 처방받으면서 진료비 5만원, 약값 14만2600원이 들어 20만원에 가까운 비용을 지불해야 했다.
기자가 받아온 '4주치 다이어트약'. 총 20만원가량의 비용을 지불했다. /사진=김세린 기자
기자가 받아온 '4주치 다이어트약'. 총 20만원가량의 비용을 지불했다. /사진=김세린 기자
이 병원이 지난 5월 마약류 식욕억제제(펜다이메트라진) 오남용 의심으로 수사를 받은 의료기관 중 하나라는 것. 식약처는 재차 수사 기관에 의뢰해 해당 병원에 대한 수사를 이어갈 것을 요청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현재까지 병원 이용에는 문제가 없었다.

향정신성의약품을 오·남용해 처방하는 의원은 마약류관리법 위반 혐의로 최장 징역 5년 또는 최대 5000만원 벌금을 부과받는다. 금고형 이상을 선고받으면 의사면허가 취소될 수도 있다. 이날 한경닷컴이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소속 서영석 의원에게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이곳의 의료용 마약류 처방량은 2019년 1월 1일부터 올해 6월 30일까지 꾸준히 증가해왔다. 2019년에만 마약류인 디아제팜을 3520명이 처방받았으나, 지난해 1만2291명이 처방받으며 3년 새 3배 이상 늘었다. 올해 들어 지난 6월까지 이곳에서는 디아제팜 5608건, 암페프라몬 5850건, 펜다이메트라진 2323건, 펜터민 976건 등 마약류로 분류되는 약품이 처방됐다.

식약처의 마약류 오남용 방지를 위한 조치기준에 따르면 펜터민과 펜다이메트라진, 엠페프라몬, 마진돌 등 식욕억제제는 2종류 이상 함께 처방할 수 없게 돼 있다. 단일제라도 3개월 이내에서만 처방해야 한다. 병원 관계자는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처방이 되는 것은 아니다. 초진자엔 4주짜리 약을, 재진자엔 4주 또는 최대 8주의 약을 처방하고 있다"며 "휴약기는 한 달 이상 가져야 하며, 개별 의학적 결정에 따라 연장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다이어트약 3대 성지'로 불리는 병원의 안내 문구. /사진=김세린 기자
'다이어트약 3대 성지'로 불리는 병원의 안내 문구. /사진=김세린 기자
식약처는 식욕억제제를 처방받으면 최대 4주까지만 복용할 것을 권고하고 있다. 복용 기간이 3개월이 넘을 경우 부작용이 발생할 위험이 커진다고 보고 있다. 하지만 의존성으로 중독 증상을 보이며 약을 끊거나 휴약기를 갖는 것에 어려움을 토로하는 이들도 있었다. 한 방문객은 "의료진이 목표 체중만큼 감량하고 약을 끊어야 한다고 했지만, 요요 걱정으로 약을 먹어야 하는 강박 때문에 4개월간 먹게 됐다"며 "약을 먹는 동안 식욕이 줄어 살이 빠지긴 했지만, 일시적이었다. 다이어트약을 끊었더니 바로 다음 날부터 먹고 싶은 욕구가 늘어났고, 일에 집중하기도 힘들었다"고 말했다.

다이어트약 오남용과 이로 인한 부작용으로 각종 사건·사고도 잇따르고 있다. 지난 5월 말 대전에서는 다이어트약 과다복용 부작용으로 상습 절도 행각을 벌인 30대 여성이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 지난 4월 초 제주 서귀포에서는 한 20대 여성이 식욕억제제를 과다 복용하고 대낮에 경찰차와 승용차 등 차량 6대를 들이받아 난폭운전을 한 혐의로 검찰에 넘겨졌다. 경찰 조사 결과, 이 여성은 다이어트약을 한 번에 수십알씩 먹는 등 오·남용했으며, 그에 따른 부작용으로 환각 등을 보여 범행을 저질렀다.

정찬승 대한신경정신의학회 이사는 "식욕억제제는 굉장히 위험한 약"이라며 "다이어트를 위해 잘못 복용했다간 약물 중독 위험이 커진다"고 경고했다. 또 "남용하거나 무분별하게 사용하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해야 한다"며 "과도한 식욕억제제 사용으로 우울, 불안이 동반될 경우 전문가와 상의가 필요할 것"이라고 당부했다.

김세린 한경닷컴 기자 celin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