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인 출신인 고혜련 칼럼니스트가 세계 곳곳을 방문한 기록을 에세이로 엮었다. 저자의 삶의 전환점이 된 장소부터 세계사에 굵직한 흔적을 남긴 명소까지 고루 소개한다. 소멸을 주제로 폼페이와 마추픽추를, 사치와 향락을 테마로 빈과 파리를 조명한다. (제이커뮤니케이션, 400쪽, 2만원)
20세기는 ‘DNA의 시대’였다. 1866년 그레고어 멘델이 완두콩 실험 결과를 발표한 후 유전자의 실체를 찾기 위한 과학자들의 경쟁이 벌어졌다.1953년 제임스 왓슨과 프랜시스 크릭의 DNA 나선구조 규명은 역사적 사건이었다. 세상은 기대에 부풀었다. DNA 염기 서열과 각 부분의 기능을 밝히면 질병 진단, 신약 개발, 개인 맞춤형 치료 등에서 엄청난 도약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13년 걸려 2003년 완료한 ‘인간 유전체 프로젝트’로 32억 쌍의 인간 DNA 염기 서열이 다 밝혀진 뒤에도 기대했던 도약은 없었다.답은 리보핵산(RNA)에 있었다. 21세기는 ‘RNA의 시대’다. 노벨상만 봐도 그렇다. 올해 노벨생리의학상은 메신저리보핵산(mRNA) 백신 개발의 토대를 닦은 연구자들에게 돌아갔다. 2020년 노벨화학상은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 연구자들이 받았다.<꿈의 분자 RNA>는 RNA의 역사를 다룬다. 저자는 김우재 교수다. 포스텍에서 바이러스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은 그는 캐나다 오타와대 교수를 거쳐 2021년부터 중국 하얼빈공업대 생명과학센터 교수로 재직 중이다. 대중을 위한 글을 오랫동안 써온 그는 이번 책에서도 어려운 과학 이야기를 쉽게 풀어냈다.RNA도 DNA처럼 유전 정보를 담고 있는 물질이다. 다른 점도 있다. DNA는 두 가닥인데 RNA는 한 가닥이다. 길이도 짧다. DNA는 A, G, C, T라는 네 글자로 유전 정보를 쓰는 반면 RNA는 A, G, C는 같지만 T 대신 U를 쓴다. 비유하자면 DNA는 모든 유전 정보가 보관된 도서관이다. RNA는 그 일부를 복사해 실제 현장에서 쓰는 도면이다.유전 정보는 후손을 낳는 데만 쓰이지 않는다. 생명 활동에 필요한 단백질을 몸속에서 합성하는 데 더 많이 쓰인다. 뼈와 근육, 피부, 혈액뿐 아니라 각종 효소, 호르몬 등이 모두 단백질이다. 이런 단백질을 만들어내는 유전 물질이 바로 RNA다.‘메신저RNA’라고 불리는 mRNA가 대표적이다. mRNA 백신은 바이러스 표면 단백질을 만드는 유전 정보를 담고 있다. 사람에게 주입하면 몸 안에서 바이러스 표면 단백질이 생성되고 면역 반응이 일어난다. 이후 실제로 바이러스가 침투했을 때 쉽게 물리칠 수 있게 돕는다.mRNA 백신 개발에도 난관은 있었다. 인공적으로 만들어 주입한 mRNA를 몸이 이물질로 인식해 공격하고 염증 반응을 일으켰다. 올해 노벨생리의학상 수상자인 커털린 커리코와 드루 와이스먼 교수는 이 거부 반응을 일으키지 않는 RNA를 개발해 2005년 발표했다. 당시에는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지만 코로나를 계기로 빛을 보게 됐다.RNA 연구는 아직 한창이다. 저자는 ‘미르(miR)’라고도 불리는 ‘마이크로RNA’가 또 하나의 게임체인저가 될 것으로 예상한다. 미르는 아주 짧다. 22개 내외의 염기 서열로 구성돼 있다. 종류와 기능이 다양한데 mRNA의 꼬리 부분과 결합하면 그 mRNA의 발현이 억제된다. 이를 통해 유전자의 발현을 조절한다. 일종의 ‘스위치’다. 노벨상 후보로 꼽히는 김빛내리 서울대 생명과학부 교수가 이 분야 권위자다.저자는 “특정 조직에서 발현되는 미르 유전자 특성을 이용하면 특정 단계에 있는 암 환자의 종양을 확인할 수 있다”며 “암 진단과 치료에 많은 도움을 줄 것”이라고 했다.책은 RNA 역사를 ‘영웅 없는 혁명’이라고 요약한다. mRNA 백신 개발 공로로 올해 두 명의 연구자가 노벨상을 받았지만 그 이면에는 RNA 연구라는 기초과학 분야에 헌신한 수백 명의 과학자가 있었다는 것이다. 노벨상 수상자를 육성하자며 시끄럽게 떠들기보다 잘 드러나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연구하는 과학자들의 노력에 따뜻한 시선을 보낼 때 우리의 기초과학이 발전할 수 있음을 시사한다. 모두가 DNA에 집중할 때 RNA 연구의 끈을 놓지 않았던 과학자들이 있었던 것처럼, 연구의 다양성 또한 중요한 덕목이라고 말한다.임근호 기자 eigen@hankyung.com
중동이 또다시 이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분쟁 때문이다. 이스라엘은 지상군 투입을 검토하고 있고 이란이 뒤를 봐주는 헤즈볼라는 북쪽에서 이스라엘을 공격할 기세다.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걸까. 최근 출간된 <최소한의 중동 수업>은 이의 실마리를 제공한다. 장지향 아산정책연구원 중동센터장이 썼다. 이번 사태까지 다루지는 않지만 중동의 지정학이 어떻게 변하고 있는지 최신 정보를 담았다.이슬람 국가들은 단합이 잘 되는 것처럼 보인다. 이번 사태만 해도 그렇다. 하마스가 먼저 잔혹한 공격을 했지만 많은 중동 국가가 이스라엘보다는 팔레스타인을 지지하는 모습이다. 실상은 그렇지 않다.저자는 “최근 중동 이슬람 세계의 핵심 갈등은 수니파와 시아파 간 대립 등 이슬람 내부 갈등”이라고 말한다. 시아파가 다수인 이란의 팽창주의에 맞서고자 2020년 수니파 아랍 국가와 유대 국가인 이스라엘이 아브라함 협정을 맺고 전략적 연대에 나섰다.저자는 “그동안 이스라엘과 다른 중동 이슬람 세계는 물과 기름 같은, 절대로 화합할 수 없는 것처럼 보였다”며 “하지만 오늘날 중동은 시대적 변화에 발맞춰 무조건적인 대립의 자세를 버리고 실리를 추구하는 방향으로 변모하고 있다”고 설명한다.이번 하마스의 이스라엘 공격은 이런 구도를 깨뜨리려는 시도로 볼 수 있다. 그래서 팔레스타인을 지지한다는 아랍 국가 역시 하마스와는 거리를 두고 있다. 중동에서 혼란을 키우는 건 이란에 좋은 일 시키는 것밖에 되지 않기 때문이다.임근호 기자 eigen@hankyung.com
2018년 12명의 태국 소년이 물이 찬 동굴에 갇혔다. 이들의 이야기가 언론을 통해 퍼지자 전 세계 수백만 명의 사람이 소년들을 응원했다. 같은 해 예멘 내전 중 굶주림으로 사망한 5세 미만 어린이 8만5000명은 훨씬 적게 보도됐다. 아이들은 세계의 관심을 받지 못한 채 죽어갔다.태국 소년들의 구출 이야기는 해피엔딩을 기대하는 많은 사람의 관심을 받으며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예멘 어린이들 사건은 상징적인 개별 사건이 없었고 저널리즘적 연출이 불가능했다. ‘구원’ 서사가 작동할 여지가 없었다.경쟁, 복수, 사랑, 구원 등과 같은 서사 구조는 영화와 소설 속에서만 작동하진 않는다. 정치, 전쟁, 뉴스, 교육, 광고 등 모든 것에 이야기가 담겨 있다. 허구든, 사실이든 정보가 교환되고 퍼지는 곳에 서사 구조가 발견된다.독일 칼럼니스트 자미라 엘 우아실과 프리데만 카릭은 <세상은 이야기로 만들어졌다>에서 스토리텔링이 어떻게 인류 역사에서 작동해왔는지 탐구한다. 선사시대 부족부터 성경, 그리스 신화, 구텐베르크 인쇄술, 할리우드 영화까지 스토리텔링이 세상에 끼친 긍정적이고도 부정적인 영향을 추적한다.영국 버밍엄대 연구진은 6000여 편의 영화를 분석해 세상의 다양한 이야기에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공통의 여섯 가지 서사 유형이 있다고 밝힌다. 가난뱅이가 백만장자가 되는 이야기, 주인공이 끝없이 추락하는 이야기, 구덩이에 빠졌다가 탈출하는 이야기, 한참 상승한 뒤 추락하는 이카로스 이야기, 고난 속에 성공하는 신데렐라 이야기, 처음에는 강한 타격을 받았다가 중간에 상승하지만 결국 비극을 맞는 오이디푸스 이야기다.정치인과 일부 기업인은 서사를 활용해 내러티브 전쟁에 뛰어든다. 서구 백인들은 과거부터 노예제도를 정당화하기 위해 자신이 다른 인종을 지배해 문명으로 인도해야 한다는 ‘구원’ 서사를 퍼뜨렸다. 나치는 중세부터 내려온 ‘사악한 유대인’ 이야기를 활용했다. 미국 회사 유나이티드프루트는 바나나 수출을 독점하기 위해 과테말라 정부를 공산주의자로 몰기도 했다.이야기는 현실을 왜곡하고 누군가의 이익을 위한 수단으로 악용될 수 있다. 진실과 거짓을 구분하는 것도 힘들고 타인의 이야기가 자아를 지배하기도 한다. 저자는 혼란한 세상에서 자기를 주인공으로 하는 이야기를 써나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최종석 기자 ellisic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