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손보험금을 청구할 때 종이서류 발급 과정을 없애고 진료받은 병원에서 신청하면 전산으로 처리되는 ‘실손보험금 청구 간소화’ 제도가 18일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서 다시 논의된다. ‘개인정보 보호’를 명분으로 14년째 관련 법 통과를 반대해온 의료계는 법이 개정되면 정보 전송 거부 운동을 벌이겠다고 나섰다. 제도 개선을 추진하는 정부는 법적 문제가 없고 금융소비자 보호를 위해 꼭 필요하다고 맞서고 있다.

미청구 실손보험금 연간 2500억원

14년 헛바퀴 '실손보험 청구 간소화' 재추진
17일 의료계와 보험업계 등에 따르면 법사위는 18일 전체회의를 열고 실손보험금 청구 간소화를 담은 보험업법 개정안을 상정할 예정이다.

실손보험금 청구 간소화는 보험 가입자가 병·의원에서 진료·결제 후 현장에서 신청하면 병·의원이 진단서와 영수증 등 보험금 청구에 필요한 서류를 전자문서로 중간 정보처리기관에 보내고, 기관은 이를 다시 보험사에 보내도록 해 편의성을 높이는 제도다.

지금은 실손보험금을 청구하려면 보험 가입자가 먼저 필요한 서류를 보험사에 확인한 뒤 병·의원에서 종이 서류를 발급받아야 한다. 이 서류를 팩스나 앱으로 보내야 신청이 마무리된다.

이런 번거로움 때문에 소액 보험금을 신청하지 않는 사례가 다수 발생했다. 국회 정무위원회 소속 윤창현 국민의힘 의원에 따르면 2021~2022년 청구되지 않은 실손보험금은 연평균 2535억원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실손보험 가입자는 작년 말 기준 3997만 명이며 연간 청구 건수는 1억 건을 넘는다.

실손보험금 청구 간소화로 이런 ‘눈먼 돈’이 주인을 찾으면 보험사는 보험금을 더 많이 지급해야 한다. 현행 제도상 서류 등 데이터 관리를 전산화한다는 것 외엔 별다른 이득이 없다. 그런데도 반대 목소리를 내지 않는 것은 정부의 ‘전자정부 실현’ 의지가 워낙 강한 데다 간소화·전산화가 피할 수 없는 길이라는 인식이 있어서다.

“종이→전자문서 변경일 뿐”

실손 청구 간소화는 소비자 편의성 증진이라는 당위성을 갖춘 데다 보험업법 개정안이 의료계가 제기한 우려를 대부분 해소해 6월 소관 상임위인 정무위를 통과했다. 이제 법사위와 본회의 의결만 남았다.

의료계는 여전히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대한의사협회 등은 개인정보 유출 가능성을 반대 이유로 내세우고 있다. 법사위 위원인 박주민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지난 13일 회의에서 개정안이 의료법 21조(의사가 환자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환자 진료기록을 제공하는 행위 금지)와 충돌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간소화 제도 도입 이후 병·의원이 중개기관에 전송하는 정보는 종이 서류로 받는 내용과 같기 때문에 간소화로 개인정보가 더 많이 유출될 가능성이 더 커지는 것은 아니라고 정부 측은 설명한다.

의료계가 걱정하는 부분은 병·의원 운영 정보가 특정 기관에 축적되면 향후 의료비 인하 압박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점이라는 분석도 있다. 정부는 이를 해소하기 위해 중간 정보처리기관을 보험개발원으로 지정하고, 보험개발원이 정보를 저장할 수 없도록 하는 보완책을 제시했다.

시민단체도 실손청구 간소화 지지파와 반대파로 나뉜다. 의료 민영화 저지와 무상의료 실현을 위한 운동본부는 실손보험금 청구가 쉬워지면 실손 가입자가 더 늘어나고, 이 때문에 민영의료가 공공의료를 넘어서는 결과가 나타날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실손보험이 국민건강보험의 보완 수단으로 자리 잡은 상황에서 실손 청구 간소화가 의료 민영화를 가속화한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떨어진다는 지적이다. 실손 청구 간소화를 지지하는 시민단체인 한국소비자단체연합은 “종이서류를 전자문서로 바꾼다고 개인정보 유출 우려가 커진다거나 보험사가 다른 보험금 지급을 회피할 것이라는 등의 주장은 근거가 희박하다”고 반박했다.

강현우 기자 hka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