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현의 로그인 e스포츠] 는 게임을 넘어 스포츠, 그리고 문화콘텐츠로 성장하고 있는 e스포츠에 대한 이야기를 다룹니다. 인상 깊었던 경기들은 물론, 궁금했던 뒷이야기 나아가 산업으로서 e스포츠의 미래에 대해 분석합니다.
T1 페이커(이상혁, 가운데) (제공=LCK)
T1 페이커(이상혁, 가운데) (제공=LCK)
T1이 2023 LCK(리그오브레전드 챔피언스 코리아) 서머 스플릿 플레이오프에서 첫 이변을 만들었다. T1은 지난 10일 정규 시즌 1위를 기록하며 압도적 우세가 예상됐던 KT 롤스터를 상대로 승리를 거뒀다. 5세트까지 가는 접전 끝에 KT를 꺾은 T1은 3라운드 승자조 경기에 진출했다. 오늘 펼쳐질 젠지 e스포츠와의 승자조 경기에서 패해도 최종 결승 진출전에 올라 대전행을 확정 지었다.

T1은 수준 높은 경기력으로 ‘어게인 2019’ 도장 깨기 우승 가능성을 한층 높였다. T1은 팀 명을 바꾸기 전인 SK텔레콤 T1 시절 2019 LCK 서머 스플릿 당시 정규 시즌 4위를 기록했다. 이후 와일드카드 전부터 시작해 차례로 플레이오프 모든 경기에서 승리하며 우승컵을 거머쥐었다. LCK 최초로 와일드카드에서 시작한 팀이 우승을 차지하며 소위 ‘도장 깨기’를 선보인 바 있다.

T1은 KT와의 승부에서 불과 몇 주 전 서머 정규리그 후반부에 최악의 부진을 보이던 팀이 맞는지 의심될 정도로 전혀 다른 경기력을 선보였다. 라인전이면 라인전, 한타면 한타 모두 KT와 대등하거나 그 이상인 면모를 보였다. T1의 이 같은 ‘대변신’은 페이커(이상혁)를 빼놓고는 설명하기 어렵다. 페이커가 부상으로 휴식하기전 6승 2패를 거뒀던 T1은 그의 휴식 이후 1승 7패라는 정반대의 결과를 얻었다.

페이커는 게임 내적인 오더, 좋은 한타를 만드는 플레이 메이킹, 운영의 맥을 짚는 움직임 등 지표로는 설명할 수 없는 강점을 지닌 선수로 평가받는다. 관계자들은 이 같은 페이커의 능력을 ‘인비저블 썸씽’이라는 표현으로 설명하곤 했다. 말 그대로 지표나 라인전처럼 눈에 대놓고 보이지는 않지만 승리에 기여하는 무언가가 있다는 의미다. 이는 T1이 부진할 때 페이커를 희화화하는 표현으로 쓰이기도 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페이커가 이번 서머 시즌 부상으로 휴식을 취하고 31일 만에 복귀하면서 그가 정말 ‘보이지 않는 영향력’을 지닌 선수라는 것이 증명됐다. 지난 7월 5일 페이커가 결장한 이후 5연패를 기록했던 T1은 마지막 주차에 페이커가 돌아온 이후 현재까지 4연승을 달리고 있다.
T1 페이커 (제공=LCK)
T1 페이커 (제공=LCK)
지난 10일 KT와의 경기에서도 페이커의 ‘인비저블 썸씽’을 엿볼 수 있는 장면이 나왔다. 1세트를 내주고 2세트 돌진 조합을 택한 T1은 초반부터 제우스(최우제)의 솔로 킬 등을 앞세워 파상공세를 펼쳤다. 흔들리던 KT에게 쐐기를 박은 건 페이커였다. 경기 시간 22분 53초경 니코의 패시브를 활용해 미니언으로 변신한 페이커는 미드 라인에서 상대 주요 딜러인 에이밍(김하람)과 비디디(곽보성)를 상대로 궁극기를 적중시켰다. 이를 흡수하기 위해 에이밍과 비디디는 초시계 아이템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페이커는 잡혔지만 생존기가 사라진 KT의 딜러들은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그 사이 T1의 다른 선수들이 합류해 KT의 나머지 선수들을 모두 잡아냈다. 이후 내셔 남작과 용을 모두 차지한 T1은 바텀 라인으로 향했고 2차 타워에서 다이브를 성공시킨 뒤 그대로 진격해 KT의 넥서스를 파괴했다. 경기는 패배했지만 4세트에도 페이커는 니코를 활용해 상대의 진영을 붕괴하는 이니시에이팅를 선보였다.

페이커의 강점은 팀의 조합에 따라 플레이메이킹은 물론 딜러의 역할도 다양하게 수행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는 지표로도 확인된다.

페이커는 플레이오프 기준 팀 내 골드 비중이 20.9%로 25.3%인 구마유시(이민형)와 23%인 제우스에 비해 낮은 편이다. T1 라이너들 중에서 가장 적은 자원을 먹고 있다. 하지만 팀 내 대미지 비중은 26.5%로 가장 높다. 실제로 KT와의 플레이오프 2라운드 5세트에서 아지르를 고른 페이커는 CS는 341로 팀 내에서 3위였고 상대 미드라이너인 비디디(429)에게도 밀렸다. 하지만 딜량은 37033으로 10명의 선수 중에 가장 높았으며 해당 경기에서 팀 내 대미지 비중 38%를 차지하며 메인 딜러 역할을 톡톡히 수행했다.

페이커는 다른 미드라이너 들과 비교해 봐도 높은 ‘가성비’를 보인다. 플레이오프에서 페이커는 분당 골드 획득량은 385로 맞상대했던 디플러스 기아의 쇼메이커(418), KT의 비디디(416)보다 낮았지만 분당 대미지는 542로 쇼메이커(564)에는 밀렸지만 비디디(504)보다 높았다. 특히 골드 당 대미지(분당 대미지를 분당 골드 획득량으로 나눈 값)는 페이커가 1.40으로 쇼메이커(1.35), 비디디(1.21)보다 앞섰다.

이주현 기자 2JuHyu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