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부채발(發) 경제 위기가 현실화하고 있다”며 배드뱅크 설치를 다시 주장하고 나섰다.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 대출 부실화와 가계부채 위기에 선제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부실 채권이나 부실 자산을 사들일 상설 정부 기금을 만들자는 게 핵심이다. 여당과 정부에선 ‘고장난 녹음기’처럼 35조원 규모 추가경정예산 편성을 주장해온 이 대표가 이번엔 나랏돈으로 빚을 탕감해주자는 또 하나의 포퓰리즘을 들고나왔다며 반대하고 있다. 민간 주도의 구조조정 시장을 위축시킬 것이란 우려도 나온다.

이 대표는 7일 최고위원회의에서 “(부채 폭탄이) 폭발하기 전에 뇌관을 제거해야 한다”며 “배드뱅크 기금 설치를 서둘러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가계부채 증가와 부동산 PF 대출 연체율 상승, 한계기업 수 확대 등을 언급하며 “부채 시한폭탄의 초침이 빨라졌다”고 주장했다.

배드뱅크 설치는 이 대표가 올해 초 기자회견에서 언급한 ‘9대 민생 프로젝트’ 중 하나다. 한국자산관리공사(캠코)에 ‘안정도약기금’을 설치해 금융권이 보유한 부실 채권과 부실 징후가 있는 기업 자산 등을 인수하도록 한다는 게 골자다. 최근 연체율이 오른 금융권의 부동산 PF 대출 채권도 매입 대상이 된다. 증권사 최고경영자(CEO) 출신인 홍성국 민주당 의원이 이런 내용의 한국자산관리공사법 개정안을 지난 3월 대표 발의했다.

이에 대해 정부 관계자는 “배드뱅크 설치는 사실상 나랏돈으로 빚 탕감을 해주는 수준의 극약 처방”이라며 “과연 지금이 정부가 나서서 이런 기금을 만들 때인지 의문”이라고 했다. 구조조정기금이라는 이름의 배드뱅크 기금이 설치된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 금융권의 부동산 PF 대출 연체율은 6.4%(2009년)였다. 현재는 2% 수준이다. 부실화 우려는 있지만, 최대한 관리되고 있다는 게 정부의 판단이다.

특히 민주당이 이번에 도입하자고 주장하는 배드뱅크는 위기 시 한시적으로 운용되는 것이 아니라 상시 기금이다. 정부 주도의 배드뱅크 기금이 민간의 구조조정 시스템과 경쟁하며 민간 시장을 위축시킬 수 있다는 게 구조조정 전문가들의 우려다. 금융당국은 오는 9월부터 총 1조원 규모 부동산 PF 사업장 정상화 펀드를 가동할 계획이다. 이 펀드는 캠코와 민간 자금 매칭 형태로 조성된다. 운용은 5개 민간 자산운용사가 맡는다.

이와 별개로 4조9000억원 규모 기업구조혁신펀드가 조성돼 운영되고 있다. 2009년 은행들이 출자해 만든 구조조정 전문 회사 연합자산관리(유암코)도 있다. 금융당국은 “(민주당 주장대로) 정부 주도의 안정도약기금이 설치되면 민간 구조조정 시장에 오히려 부정적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입장이다. 이에 대해 홍 의원은 통화에서 “부채 관리를 시장에 맡기면 시간이 오래 걸린다”며 “선제적으로 기금을 만들어 위기 시 충격에 대비해야 한다”고 했다.

정부 주도의 배드뱅크 설치가 문재인 정부 때 마련된 금융행정혁신 권고를 거스른다는 지적이 나온다. 금융행정혁신위원회는 2017년 12월 “자본시장 중심의 선제적인 구조조정 체제 확립이 필요하다”고 권고했다. 당시 금융행정혁신위원장으로 권고안 작성을 주도한 인물이 문재인 정부에서 금융감독원장을 지낸 윤석헌 전 원장이다. 캠코 소관 상임위원회인 국회 정무위원회 전문위원실도 이런 이유로 “안정도약기금 설치를 보다 면밀하게 검토할 필요가 있다”며 부정적 의견을 냈다.

한재영/전범진 기자 jyha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