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름의 하나, 워홀과 바스키아의 합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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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정준모의 '아트 노스탤지어'
워홀과 바스키아
화무십일홍이라 했던가? 그래서 미술가들에게 예술적 성과와 그에 따르는 명예와 재물은 신기루에 가까운 것인지도 모르겠다. 1980년대 반짝하면서 낙양의 지가를 올렸던 화가들의 이름을 지금은 일부러 찾아보려 해도 찾기 힘든 경우가 많다. 작가들 명성이 등락, 낙폭이 큰 것은 세상의 흐름인 모양이다.
2023년 현재 세상의 미술인 중 가장 재산이 많다는 데미안 허스트(Damien Hirst, 1965~ )나 제프 쿤스(Jeff Koons, 1955~ )도 잊히지 않으려고 발버둥 치고 있다. 생전에 명성을 얻고 최고가 되는 일은 정말 어렵지만 설혹 이루었다 해도 그것을 지키기란 더더욱 어려운 것이 세상 이치다. 따라서 살아 명성을 쌓았다 하더라도 세상을 떠나 그것이 유지된다면 진정 성공한 예술가라고 할 것이다. 그리고 이는 곧 미술사에 이름이 등재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세상을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세상을 등진 앤디 워홀(Andy Warhol, 1928~87)과 장 미쉘 바스키아(Jean Michel Basquiat, 1960~88)도 둘의 명성이 여전하고 중요미술관에서 전시가 이어지는 것은 그들의 미술사적 성과와 미학적 성취가 생전에 완성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항상 전시를 통해 이슈를 만들고, 미술사적으로 의미있는 작가들을 발굴 또는 재고하며 미술 시장에도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파리의 루이뷔통 재단(Fondation Louis Vuitton)에서 열리고 있는 <바스키아×워홀; 연탄(聯彈) 회화> (BASQUIAT × WARHOL ; PAINTING FOUR HANDS, 2023년 5월 4일~8월 28일) 전만 보아도 그들의 생전의 예술적 성취가 사후에도 꺼지지 않고 여전히 활활 타오르고 있다는 것을 실감하게 한다.
루이뷔통 재단은 2018년 <장 미쉘 바스키아>전을 개최한 다음 이번 전시를 통해 그의 멘토이자 예술의 장로라 할 앤디 워홀과의 공동 작업(Collaboration)을 통해 바스키아의 예술세계를 보다 깊이 탐색한 결과를 공개하는 자리다. 두 사람은 1984년부터 1985년까지 2년간 약 160점의 그림을 함께 그렸다. 이번 전시에는 협업한 80점의 작품이 선보이고 있다. 당시 이들의 공동작업을 지켜보았던 키스 해링(Keith Haring,1958~90)은 두 사람의 협업을 “말이 아닌 그림을 통해 이루어지는 대화”, 두 마음이 합쳐져 “제3의 독특하고 독특한 마음”을 만든다고 했다.
이렇게 두 사람이 하나가 되어 4개의 손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것은 1982년부터지만 두 사람의 첫 만남은 1979년 이루어졌다. 바스키아는 당시 성공한 화가이자 인플루언서였던 워홀을 만나기 위해 그가 식사하던 W.P.A. 레스토랑을 찾아갔다. 1976년부터 알 디아즈(Al Diaz,1959~ )와 함께 그래피티 유닛 ‘사모(SAMO)’로 활동하던 바스키아는 당시 친구 제니퍼 스타인(Jennifer Stein,1957~ ) 함께 엽서를 만들어 소호에서 장당 1달러에 팔던 시절이었다. 바스키아는 자신을 신진작가라고 소개했지만, 함께 식사 중이던 현대 미술평론가 헨리 겔드잘러(Henry Geldzahler,1935~94)는 ‘너무 어리다’고 흥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워홀은 그가 내민 <바보 같은 게임, 나쁜 생각(Stupid Games, Bad Ideas)>이란 엽서를 사 주었다. 바스키아, 두 개의 머리(Dos Cabezas), 1982
바스키아는 보다 큰 꿈을 가지고 1980년부터 그라피티를 포기하고 전통적인 회화작업을 시작한다. 화상인 제프리 다이치(Jeffrey Deitch,1952~ )에 의하면 바스키아는 이때 가장 짧은 기간에 ‘국제 무대에서 가장 존경받는 젊은 예술가’가 되었다. 그는 거리를 떠나 미술관과 화랑에 진입하면서 특히 1981년 MoMA PS1에서 열린전에 워홀과 키스 해링과 함께 참여해 많은 상업 화랑의 주목을 받는다.
1982년 바스키아는 워홀의 스튜디오 ‘공장(Factory)’에서 스위스의 화상이자 컬렉터인 브루노 비쇼프베르거(Bruno Bischofberger,1940~ )에 의해 워홀에 정식으로 인사했다. 바스키아가 이름을 알리게 된 것은 화상인 비쇼프베르거의 눈에 뜨인 것이 계기가 되었고 1개월 전 이미 스위스에 있는 그의 화랑에서 개인전을 열고 있었다.
이날 워홀은 폴라로이드로 둘의 얼굴을 촬영했고 바스키아는 점심도 거르고 돌아가 2시간 만에 이 사진을 바탕으로 워홀과 자신의 얼굴을 그린 <두개의 머리>(Dos Cabezas)(1982, 혼합재료, 151.8× 154cm)를 그려 아직 물감도 마르지 않은 작품을 워홀에게 보내왔다. 바스키아는 워홀에게 인정받기위해 최선을 다했을지 모르지만, 아무튼 이 작품은 두 사람의 우정에 불을 붙인, 관계의 시작을 나타내는 상징적인 작품이 되었다. 그리고 이후 두 사람의 협업이 시작되고, 워홀은 바스키아의 후견인 역을 자처한다. 그리고 1983년 8월, 바스키아는 워홀 소유의 다락방으로 이사해 이곳을 그의 침실이자 작업실로 쓰면서 아지트가 되었다. 워홀, 바스키아의 초상(1982)
처음 공동작업은 워홀과 바스키아 그리고 이탈리아 트랜스 아방가르드 작가 클레멘테 (Francesco Clemente, 1952~ )가 참여하는 세 사람의 공동작업이었다. 이들은 스위스 비쇼프베르거의 차고에서도 함께 작업했지만, 대개는 누군가 그림을 그려 우편으로 다음 사람에게 보내면 그 위에 그림을 덧그리고 다시 우편으로 보내 다음 사람이 그림을 완성하는 식으로 협업해서 약 15점의 작품을 완성했다.
이후 두 사람의 협업은 속도가 붙었고 1984년부터는 워홀의 팝 아트 기법과 바스키아의 충동적이고 예측할 수 없는 회화적 접근법을 결합한 말 그대로 두 사람의 스타일이 융합된 작품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바스키아는 새로운 언어의 선구자이자 대중문화와 현대미술의 획기적인 관계를 개척한 워홀을 존경했다. 워홀은 바스키아를 통해 회화의 맛과 의미를 새롭게 발견해 20여년만에 다시 붓을 사용해 다이나믹하고 회화적인 필선의 기세와 화려함을 담아냈고 바스키아는 실크스크린 기법을 사용하는 등 새로운 표현 방법에 눈 떠 작품의 폭을 넓혀갔다.
하지만 세상은 이 두 사람의 우정을 두고 보지만은 않았다. 그들의 작가로서 공동작업의 뜨거운 관계는 1985년 가을에 열린 <앤디 워홀과 장 미셸 바스키아>(Tony Shafrazi Gallery, 1985년 9월 14일~10월 19일) 전이 혹평을 받으면서 파탄을 맞았다.
합작한 16점의 작품이 출품된 이 전시회를 두고 뉴욕타임스 (1985년 9월 20일자)는 바스키아를 워홀의 ‘마스코트’라고 썼다. 두 사람이 승승장구할수록 둘의 우정은 의심을 샀다. 바스키아가 “워홀의 명성에 편승하고 있다”던가 워홀이 “바스키아를 이용해 젊은 예술가의 인기에 편승하고 있다” 등의 이야기가 말뿐 아니라 글로도 나왔다. 하지만 워홀은 일기에 ‘그는 최고다’라고 썼고 함께 한 많은 사진과 에피소드는 두 사람의 우정과 진정한 예술적 동지애를 증명한다. 하지만 권투 선수로 분장한 작가들의 사진이 포스터로 쓰인 이 전시회에 대한 판정은 “워홀, 16라운드 TKO”였다. 1985년 합작전을 혹평한 뉴욕타임스 (1985년 9월 20일자)
헤로인 상용자로 우울증을 앓고 있던 바스키아는 점점 워홀과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워홀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전시회를 마친 3개월 뒤 워홀은 일기에 “바스키아에게 전화해도 답이 없다”는 글을 남겼다. 전시회 결과, 작품이 생각만큼 평가받지 못하자 세상에서 버림받은 듯한 느낌을 받은 바스키아는 소외감으로 손대는 마약 양도 늘어갔다. 이후 바스키아는 워홀에게 전화도 하지 않고, 합작도 그만둔다.
그리고 1987년 2월, 워홀은 담낭 수술을 받은 다음 날 갑자기 상태가 나빠지면서 58세로 생을 마감했다. 워홀의 죽음에 상심한 바스키아는 더욱 헤로인에 의지하면서 동시에 이를 끊으려 노력하지만 결국 헤로인 과다복용으로 27세의 나이에 사망했다. 혹자는 바스키아의 죽음을 워홀의 죽음보다 갑작스레 얻은 명성에 대한 부담, 예술 산업의 착취성, 백인이 지배하는 예술계에서 흑인으로서의 압박감이 그를 마약으로 이끌었고 결국 죽음에 이르게 했다고 말했다. 아무튼 팝 아트의 기수로 시대를 상징하는 워홀, 그리고 새로운 바스키아의 존재 그리고 두 사람의 합작은 혹평에도 불구하고 매우 자극적인 일이었다. 그리고 단 몇 년간의 두 사람 우정은 앞으로도 영원히 사람들은 매혹시킬 것이다.
그들이 세상을 떠난 후 워홀과 바스키아의 전시는 각각 또는 함께 세계 각지에서 열렸다.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어서 워홀 사후 4년, 바스키아 사후 3년 만인 1991년 <워홀과 바스키아의 세계> 전이 열렸다. 1992년 뉴욕 휘트니 미술관에서 예정되어있는 대규모 <워홀·바스키아>전보다 1년 앞서 열리는 전시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한국미술계도 세계미술의 흐름에 함께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지금 생각하면 불과 30여 년 전이지만, 개발 도상국가 수준의 우리나라 미술계 입장에서는 대단한 일이었다. 변변한 미술품 전문운송사도 없고 해외 작품 반입을 위한 보험도 제대로 갖추어지지 못한 상태에서 어쩌면 좀 무모하다 할 그런 전시였다.
전시에 출품된 작품은 회화, 입체, 워홀과 바스키아의 합작품 2점을 비롯해 총 54점이었다. 전시는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과 경주선재미술관(현 우양미술관)이 공동 기획한 것으로 1991년 9월 14일부터 10월20일까지 경주선재미술관에서 전시한 후, 11월 1일부터 30일까지 국립현대미술관(과천) 제5전시실에서 열렸다.
“22세의 나이 차를 극복하고 현대미술의 새 장을 열었다”는 평가와 함께 예술적 생을 공유했던 삶의 일단과 예술을 감상 기회라고 자랑했다. 하지만 여전히 관객들에게 현대미술이란 생소한 것이었고 워홀의 광고판 같은 그림이나 붓을 사용하지 않고 판화기법인 실크스크린으로 인쇄한 작품은 낮설었다. 또 바스키아의 낙서같은 그림을 보는 것도 마 뜩지 않았다. 또 해로인, 동성애자 같은 단어도 관객들을 불편하게 했다. 또 국립현대미술관에 전시된 바스키아 작품에 붙어있는 작품의 일부인 메모지 중 좀 구겨진 부분을 펴고 찢긴 부분을 뜯어내 깨끗하게 정리(?)해 준 관객도 나타나 미술관을 난처하게 만들기도 했다. 바스키아, 전문가 패널, 1982
당시 국립현대미술관은 1986년 과천으로 이전했지만 1988년 올림픽이 끝나자 마치 올림픽 때문에 미술관을 세운 것처럼 예산도 인력도 줄어들어 변변치 못한 상황에서 열린 전시다. 경주 선재미술관과 공동 기획이라고 하지만 많은 부분을 경주선재미술관 특히 경제적인 부분을 많이 의존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1991년 5월 18일 개관한 경주 선재미술관은 건축가 김종성(1935~ )의 작품으로 경주 힐튼호텔 부지에 세워진 현재 서울에 있는 선재아트센터의 친정 같은 곳이다. 2013년 지금의 우양미술관으로 이름이 바뀌었지만, 김우중(1936~2019) 대우그룹 회장의 부인 동우개발 대표 정희자(1940~ )가 건립한 것으로 1990년 미국에서 사망한 큰아들의 이름을 따서 미술관 명칭을 지었다. 관장은 서양화가 이세득(1921~2001)이 맡았었다. 이후 그동안 접할 수 없었던 해외 유명작가의 전시는 동시대작가들의 전시 그리고 한국현대미술의 근간이 되는 작가들을 재조명하는 전시를 비롯 많은 전시기획을 통해 한국미술관사의 새로운 이정표를 세웠다.
워홀과 바스키아는 각각 전설로 신화로 남았지만 두 사람의 관계는 꾸준하게 전시회로, 영화 와 연극, 책으로 제작되어 후대의 다른 장르 예술가들에게까지 영감이 되고 있다. 1996년 화가 줄리앙 슈나벨(Julian Schnabel, 1951~ )은 <바스키아>(Basquiat)라는 장편 전기영화를 감독했다. 제프리 라이트(Jefrrey Wright, 1965~ )가 바스키아를, 영국의 싱어송라이터 겸 배우 데이비드 보위(David Bowie, 1947~ )이 워홀, 데니스 호퍼(Dennis Hopper, 1936~2010)가 비쇼프베르거를 맡아 열연한 영화는 흥행에도 큰 성공을 거두었다.
2022년 2월 런던의 영빅 극장(Young Vic Theatre)에서 초연된 앤디 워홀과 바스키아의 공동작업에 관한 연극 <협업>(Collaboration)은 런던의 극작가 안토니 매카튼(Anthony McCarten,1961~ )이 대본을 쓰고 콰메 크웨이 아마(Kwame Kwei-Armah,1967~ )가 연출한 작품이다. 두 사람의 협업, 공동작업을 전개했던 시기의 의기투합과 갈등 그리고 그들을 헤어지게 한 전시회까지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 연극은 매카튼의 종교, 예술 및 돈에 대한 집단적 매력을 탐구하는 <예배 3부작>의 두 번째 작품이다. 이후 연극은 뉴욕의 브로드웨이로 장소를 옮겨 사무엘 J. 프리드먼 극장(Samuel J. Friedman Theatre)은 공연되었다. 바스키아+워홀, 팔과 망치 II (Arm-and-Hammer II), 1984~85
그리고 연극은 다시 영화로 제작될 예정이다. 감독은 연극을 연출한 콰메 크웨이 아마가 맡고 영화에서도 연극과 마찬가지로 폴 베터니(Paul Bettany, 1971~ )가 워홀을, 제레미 포프(Jeremy Pope,1992~ )가 바스키아를 그리고 다니엘 브륄(Daniel Brühl, 1978~ )이 비쇼프베르거를 연기한다.
또 바스키아의 흥망성쇠를 다룬 전기영화도 제작 중이다. 줄리오스 오나(Julius Onah, 1983~ )가 감독을 맡고, 피터 글란츠(Peter Glanz,1972~ )와 함께 대본을 쓴 영화는 지난해부터 제작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2021년, 워홀의 고향 펜실베이니아의 피츠버그에 있는 앤디 워홀 미술관은 <워홀과 바스키아의 초점: 영구 컬렉션>(Warhol and Basquiat In Focus: Works from the Permanent Collection, 2021년 6월 7일~9월 20일)이란 전시를 비롯해 세계 여러 곳에서 크고 작은 전시로 두 사람의 협업을 조망하는 전시가 열리고 있다. 지금 열리는 루이뷔통 재단의 전시도 1991년 국립현대미술관과 경주선재미술관에서 열렸던 전시도 그런 많은 전시중 하나다.
워홀과 바스키아의 협업이 당시 왜 그렇게 혹평을 받았나 알 수 없지만, 미술의 역사가 진행되고 시간의 흐름이 우리에게 과거의 역사와 작품에 대해 새로운 통찰력을 제공하면 미술사는 항상 새로운 의미의 층으로 채워져 간다. 그리고 이는 미술관 고유의 일이기도 하다.
우리가 과거 잘못된 판단을 했다고 해도 그것을 깨닫고, 지난 과거의 현상을 재분석하든, 그 의미에 대한 탐구와 재해석의 결과는 이전의 예술가들이 일구어 놓은 위대한 유산과 업적에 대한 겸허한 감사와 탄복으로 끝난다. 이는 워홀과 바스키아의 관계와 협업의 성과도 마찬가지다.
미술사에서 살아남기
미술사를 읽다 보면 화가를 비롯한 예술가들이 예술성을 인정받아 생전에 명예와 부를 함께 누리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하지만 20세기 들어 세상이 하루가 다르게 바뀌면서 당대에 인정받기 어렵다는 공식은 많이 훼손된 듯하다. 생전에 이미 전설이 된 피카소(Pablo Picasso, 1881~1973)나 달리(Salvador Dali, 1904~89)를 시작으로 그 후 많은 생존 화가가 살아서 명예와 부를 누린 경우가 늘기 시작했다. 물론 살아서 인정받지 못했던 화가들이 세상을 떠나고 새롭게 발견 또는 발굴되기도 하지만 이에 반해 살아서 한때를 풍미했던 작가중 그 지속 기간이 그저 5~10년 아니 불과 2~3년에 불과한 이들도 있다. 최근 우리나라도 불과 6개월 만에 미술 시장의 온탕에서 냉탕으로 곤두박질치는 이들이 적지 않다.화무십일홍이라 했던가? 그래서 미술가들에게 예술적 성과와 그에 따르는 명예와 재물은 신기루에 가까운 것인지도 모르겠다. 1980년대 반짝하면서 낙양의 지가를 올렸던 화가들의 이름을 지금은 일부러 찾아보려 해도 찾기 힘든 경우가 많다. 작가들 명성이 등락, 낙폭이 큰 것은 세상의 흐름인 모양이다.
2023년 현재 세상의 미술인 중 가장 재산이 많다는 데미안 허스트(Damien Hirst, 1965~ )나 제프 쿤스(Jeff Koons, 1955~ )도 잊히지 않으려고 발버둥 치고 있다. 생전에 명성을 얻고 최고가 되는 일은 정말 어렵지만 설혹 이루었다 해도 그것을 지키기란 더더욱 어려운 것이 세상 이치다. 따라서 살아 명성을 쌓았다 하더라도 세상을 떠나 그것이 유지된다면 진정 성공한 예술가라고 할 것이다. 그리고 이는 곧 미술사에 이름이 등재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세상을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세상을 등진 앤디 워홀(Andy Warhol, 1928~87)과 장 미쉘 바스키아(Jean Michel Basquiat, 1960~88)도 둘의 명성이 여전하고 중요미술관에서 전시가 이어지는 것은 그들의 미술사적 성과와 미학적 성취가 생전에 완성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항상 전시를 통해 이슈를 만들고, 미술사적으로 의미있는 작가들을 발굴 또는 재고하며 미술 시장에도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파리의 루이뷔통 재단(Fondation Louis Vuitton)에서 열리고 있는 <바스키아×워홀; 연탄(聯彈) 회화> (BASQUIAT × WARHOL ; PAINTING FOUR HANDS, 2023년 5월 4일~8월 28일) 전만 보아도 그들의 생전의 예술적 성취가 사후에도 꺼지지 않고 여전히 활활 타오르고 있다는 것을 실감하게 한다.
협업, 연탄곡(Two Hands)
미카엘 할스밴드, 워홀과 바스키아, 1985루이뷔통 재단은 2018년 <장 미쉘 바스키아>전을 개최한 다음 이번 전시를 통해 그의 멘토이자 예술의 장로라 할 앤디 워홀과의 공동 작업(Collaboration)을 통해 바스키아의 예술세계를 보다 깊이 탐색한 결과를 공개하는 자리다. 두 사람은 1984년부터 1985년까지 2년간 약 160점의 그림을 함께 그렸다. 이번 전시에는 협업한 80점의 작품이 선보이고 있다. 당시 이들의 공동작업을 지켜보았던 키스 해링(Keith Haring,1958~90)은 두 사람의 협업을 “말이 아닌 그림을 통해 이루어지는 대화”, 두 마음이 합쳐져 “제3의 독특하고 독특한 마음”을 만든다고 했다.
이렇게 두 사람이 하나가 되어 4개의 손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것은 1982년부터지만 두 사람의 첫 만남은 1979년 이루어졌다. 바스키아는 당시 성공한 화가이자 인플루언서였던 워홀을 만나기 위해 그가 식사하던 W.P.A. 레스토랑을 찾아갔다. 1976년부터 알 디아즈(Al Diaz,1959~ )와 함께 그래피티 유닛 ‘사모(SAMO)’로 활동하던 바스키아는 당시 친구 제니퍼 스타인(Jennifer Stein,1957~ ) 함께 엽서를 만들어 소호에서 장당 1달러에 팔던 시절이었다. 바스키아는 자신을 신진작가라고 소개했지만, 함께 식사 중이던 현대 미술평론가 헨리 겔드잘러(Henry Geldzahler,1935~94)는 ‘너무 어리다’고 흥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워홀은 그가 내민 <바보 같은 게임, 나쁜 생각(Stupid Games, Bad Ideas)>이란 엽서를 사 주었다. 바스키아, 두 개의 머리(Dos Cabezas), 1982
바스키아는 보다 큰 꿈을 가지고 1980년부터 그라피티를 포기하고 전통적인 회화작업을 시작한다. 화상인 제프리 다이치(Jeffrey Deitch,1952~ )에 의하면 바스키아는 이때 가장 짧은 기간에 ‘국제 무대에서 가장 존경받는 젊은 예술가’가 되었다. 그는 거리를 떠나 미술관과 화랑에 진입하면서 특히 1981년 MoMA PS1에서 열린
1982년 바스키아는 워홀의 스튜디오 ‘공장(Factory)’에서 스위스의 화상이자 컬렉터인 브루노 비쇼프베르거(Bruno Bischofberger,1940~ )에 의해 워홀에 정식으로 인사했다. 바스키아가 이름을 알리게 된 것은 화상인 비쇼프베르거의 눈에 뜨인 것이 계기가 되었고 1개월 전 이미 스위스에 있는 그의 화랑에서 개인전을 열고 있었다.
이날 워홀은 폴라로이드로 둘의 얼굴을 촬영했고 바스키아는 점심도 거르고 돌아가 2시간 만에 이 사진을 바탕으로 워홀과 자신의 얼굴을 그린 <두개의 머리>(Dos Cabezas)(1982, 혼합재료, 151.8× 154cm)를 그려 아직 물감도 마르지 않은 작품을 워홀에게 보내왔다. 바스키아는 워홀에게 인정받기위해 최선을 다했을지 모르지만, 아무튼 이 작품은 두 사람의 우정에 불을 붙인, 관계의 시작을 나타내는 상징적인 작품이 되었다. 그리고 이후 두 사람의 협업이 시작되고, 워홀은 바스키아의 후견인 역을 자처한다. 그리고 1983년 8월, 바스키아는 워홀 소유의 다락방으로 이사해 이곳을 그의 침실이자 작업실로 쓰면서 아지트가 되었다. 워홀, 바스키아의 초상(1982)
처음 공동작업은 워홀과 바스키아 그리고 이탈리아 트랜스 아방가르드 작가 클레멘테 (Francesco Clemente, 1952~ )가 참여하는 세 사람의 공동작업이었다. 이들은 스위스 비쇼프베르거의 차고에서도 함께 작업했지만, 대개는 누군가 그림을 그려 우편으로 다음 사람에게 보내면 그 위에 그림을 덧그리고 다시 우편으로 보내 다음 사람이 그림을 완성하는 식으로 협업해서 약 15점의 작품을 완성했다.
이후 두 사람의 협업은 속도가 붙었고 1984년부터는 워홀의 팝 아트 기법과 바스키아의 충동적이고 예측할 수 없는 회화적 접근법을 결합한 말 그대로 두 사람의 스타일이 융합된 작품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바스키아는 새로운 언어의 선구자이자 대중문화와 현대미술의 획기적인 관계를 개척한 워홀을 존경했다. 워홀은 바스키아를 통해 회화의 맛과 의미를 새롭게 발견해 20여년만에 다시 붓을 사용해 다이나믹하고 회화적인 필선의 기세와 화려함을 담아냈고 바스키아는 실크스크린 기법을 사용하는 등 새로운 표현 방법에 눈 떠 작품의 폭을 넓혀갔다.
결별 그리고 죽음
1985년 합작 전시 포스터하지만 세상은 이 두 사람의 우정을 두고 보지만은 않았다. 그들의 작가로서 공동작업의 뜨거운 관계는 1985년 가을에 열린 <앤디 워홀과 장 미셸 바스키아>(Tony Shafrazi Gallery, 1985년 9월 14일~10월 19일) 전이 혹평을 받으면서 파탄을 맞았다.
합작한 16점의 작품이 출품된 이 전시회를 두고 뉴욕타임스 (1985년 9월 20일자)는 바스키아를 워홀의 ‘마스코트’라고 썼다. 두 사람이 승승장구할수록 둘의 우정은 의심을 샀다. 바스키아가 “워홀의 명성에 편승하고 있다”던가 워홀이 “바스키아를 이용해 젊은 예술가의 인기에 편승하고 있다” 등의 이야기가 말뿐 아니라 글로도 나왔다. 하지만 워홀은 일기에 ‘그는 최고다’라고 썼고 함께 한 많은 사진과 에피소드는 두 사람의 우정과 진정한 예술적 동지애를 증명한다. 하지만 권투 선수로 분장한 작가들의 사진이 포스터로 쓰인 이 전시회에 대한 판정은 “워홀, 16라운드 TKO”였다. 1985년 합작전을 혹평한 뉴욕타임스 (1985년 9월 20일자)
헤로인 상용자로 우울증을 앓고 있던 바스키아는 점점 워홀과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워홀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전시회를 마친 3개월 뒤 워홀은 일기에 “바스키아에게 전화해도 답이 없다”는 글을 남겼다. 전시회 결과, 작품이 생각만큼 평가받지 못하자 세상에서 버림받은 듯한 느낌을 받은 바스키아는 소외감으로 손대는 마약 양도 늘어갔다. 이후 바스키아는 워홀에게 전화도 하지 않고, 합작도 그만둔다.
그리고 1987년 2월, 워홀은 담낭 수술을 받은 다음 날 갑자기 상태가 나빠지면서 58세로 생을 마감했다. 워홀의 죽음에 상심한 바스키아는 더욱 헤로인에 의지하면서 동시에 이를 끊으려 노력하지만 결국 헤로인 과다복용으로 27세의 나이에 사망했다. 혹자는 바스키아의 죽음을 워홀의 죽음보다 갑작스레 얻은 명성에 대한 부담, 예술 산업의 착취성, 백인이 지배하는 예술계에서 흑인으로서의 압박감이 그를 마약으로 이끌었고 결국 죽음에 이르게 했다고 말했다. 아무튼 팝 아트의 기수로 시대를 상징하는 워홀, 그리고 새로운 바스키아의 존재 그리고 두 사람의 합작은 혹평에도 불구하고 매우 자극적인 일이었다. 그리고 단 몇 년간의 두 사람 우정은 앞으로도 영원히 사람들은 매혹시킬 것이다.
32년 전 한국에서의 바스키아와 워홀
워홀+바스키아, 무제(합작도 no.23), 1984~85그들이 세상을 떠난 후 워홀과 바스키아의 전시는 각각 또는 함께 세계 각지에서 열렸다.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어서 워홀 사후 4년, 바스키아 사후 3년 만인 1991년 <워홀과 바스키아의 세계> 전이 열렸다. 1992년 뉴욕 휘트니 미술관에서 예정되어있는 대규모 <워홀·바스키아>전보다 1년 앞서 열리는 전시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한국미술계도 세계미술의 흐름에 함께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지금 생각하면 불과 30여 년 전이지만, 개발 도상국가 수준의 우리나라 미술계 입장에서는 대단한 일이었다. 변변한 미술품 전문운송사도 없고 해외 작품 반입을 위한 보험도 제대로 갖추어지지 못한 상태에서 어쩌면 좀 무모하다 할 그런 전시였다.
전시에 출품된 작품은 회화, 입체, 워홀과 바스키아의 합작품 2점을 비롯해 총 54점이었다. 전시는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과 경주선재미술관(현 우양미술관)이 공동 기획한 것으로 1991년 9월 14일부터 10월20일까지 경주선재미술관에서 전시한 후, 11월 1일부터 30일까지 국립현대미술관(과천) 제5전시실에서 열렸다.
“22세의 나이 차를 극복하고 현대미술의 새 장을 열었다”는 평가와 함께 예술적 생을 공유했던 삶의 일단과 예술을 감상 기회라고 자랑했다. 하지만 여전히 관객들에게 현대미술이란 생소한 것이었고 워홀의 광고판 같은 그림이나 붓을 사용하지 않고 판화기법인 실크스크린으로 인쇄한 작품은 낮설었다. 또 바스키아의 낙서같은 그림을 보는 것도 마 뜩지 않았다. 또 해로인, 동성애자 같은 단어도 관객들을 불편하게 했다. 또 국립현대미술관에 전시된 바스키아 작품에 붙어있는 작품의 일부인 메모지 중 좀 구겨진 부분을 펴고 찢긴 부분을 뜯어내 깨끗하게 정리(?)해 준 관객도 나타나 미술관을 난처하게 만들기도 했다. 바스키아, 전문가 패널, 1982
당시 국립현대미술관은 1986년 과천으로 이전했지만 1988년 올림픽이 끝나자 마치 올림픽 때문에 미술관을 세운 것처럼 예산도 인력도 줄어들어 변변치 못한 상황에서 열린 전시다. 경주 선재미술관과 공동 기획이라고 하지만 많은 부분을 경주선재미술관 특히 경제적인 부분을 많이 의존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1991년 5월 18일 개관한 경주 선재미술관은 건축가 김종성(1935~ )의 작품으로 경주 힐튼호텔 부지에 세워진 현재 서울에 있는 선재아트센터의 친정 같은 곳이다. 2013년 지금의 우양미술관으로 이름이 바뀌었지만, 김우중(1936~2019) 대우그룹 회장의 부인 동우개발 대표 정희자(1940~ )가 건립한 것으로 1990년 미국에서 사망한 큰아들의 이름을 따서 미술관 명칭을 지었다. 관장은 서양화가 이세득(1921~2001)이 맡았었다. 이후 그동안 접할 수 없었던 해외 유명작가의 전시는 동시대작가들의 전시 그리고 한국현대미술의 근간이 되는 작가들을 재조명하는 전시를 비롯 많은 전시기획을 통해 한국미술관사의 새로운 이정표를 세웠다.
살아있는 전설, 워홀과 바스키아
바스키아와 워홀, 생전 한 번도 전시된 적 없는 공동 작업 10개의 펀칭백(최후의 만찬) 설치 전경워홀과 바스키아는 각각 전설로 신화로 남았지만 두 사람의 관계는 꾸준하게 전시회로, 영화 와 연극, 책으로 제작되어 후대의 다른 장르 예술가들에게까지 영감이 되고 있다. 1996년 화가 줄리앙 슈나벨(Julian Schnabel, 1951~ )은 <바스키아>(Basquiat)라는 장편 전기영화를 감독했다. 제프리 라이트(Jefrrey Wright, 1965~ )가 바스키아를, 영국의 싱어송라이터 겸 배우 데이비드 보위(David Bowie, 1947~ )이 워홀, 데니스 호퍼(Dennis Hopper, 1936~2010)가 비쇼프베르거를 맡아 열연한 영화는 흥행에도 큰 성공을 거두었다.
2022년 2월 런던의 영빅 극장(Young Vic Theatre)에서 초연된 앤디 워홀과 바스키아의 공동작업에 관한 연극 <협업>(Collaboration)은 런던의 극작가 안토니 매카튼(Anthony McCarten,1961~ )이 대본을 쓰고 콰메 크웨이 아마(Kwame Kwei-Armah,1967~ )가 연출한 작품이다. 두 사람의 협업, 공동작업을 전개했던 시기의 의기투합과 갈등 그리고 그들을 헤어지게 한 전시회까지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 연극은 매카튼의 종교, 예술 및 돈에 대한 집단적 매력을 탐구하는 <예배 3부작>의 두 번째 작품이다. 이후 연극은 뉴욕의 브로드웨이로 장소를 옮겨 사무엘 J. 프리드먼 극장(Samuel J. Friedman Theatre)은 공연되었다. 바스키아+워홀, 팔과 망치 II (Arm-and-Hammer II), 1984~85
그리고 연극은 다시 영화로 제작될 예정이다. 감독은 연극을 연출한 콰메 크웨이 아마가 맡고 영화에서도 연극과 마찬가지로 폴 베터니(Paul Bettany, 1971~ )가 워홀을, 제레미 포프(Jeremy Pope,1992~ )가 바스키아를 그리고 다니엘 브륄(Daniel Brühl, 1978~ )이 비쇼프베르거를 연기한다.
또 바스키아의 흥망성쇠를 다룬 전기영화
2021년, 워홀의 고향 펜실베이니아의 피츠버그에 있는 앤디 워홀 미술관은 <워홀과 바스키아의 초점: 영구 컬렉션>(Warhol and Basquiat In Focus: Works from the Permanent Collection, 2021년 6월 7일~9월 20일)이란 전시를 비롯해 세계 여러 곳에서 크고 작은 전시로 두 사람의 협업을 조망하는 전시가 열리고 있다. 지금 열리는 루이뷔통 재단의 전시도 1991년 국립현대미술관과 경주선재미술관에서 열렸던 전시도 그런 많은 전시중 하나다.
워홀과 바스키아의 협업이 당시 왜 그렇게 혹평을 받았나 알 수 없지만, 미술의 역사가 진행되고 시간의 흐름이 우리에게 과거의 역사와 작품에 대해 새로운 통찰력을 제공하면 미술사는 항상 새로운 의미의 층으로 채워져 간다. 그리고 이는 미술관 고유의 일이기도 하다.
우리가 과거 잘못된 판단을 했다고 해도 그것을 깨닫고, 지난 과거의 현상을 재분석하든, 그 의미에 대한 탐구와 재해석의 결과는 이전의 예술가들이 일구어 놓은 위대한 유산과 업적에 대한 겸허한 감사와 탄복으로 끝난다. 이는 워홀과 바스키아의 관계와 협업의 성과도 마찬가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