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마다 장미꽃이 활짝 피고 그 향기에 취해 비틀거리기 좋을 햇살이 알맞게 내리쬐고 있다. 때마침 우리나라에서는 5월 14일을 ‘로즈데이’로 지칭하고 있고, 6월 1일의 탄생화는 장미이다.

장미는 시인의 뮤즈이다. “소년이 말했네: 너를 꺾을 테야. 들에 핀 장미야! 장미가 말했네: 너를 찌를 테야! 나를 영원히 잊지 못하도록!” 여러 작곡가들의 손에서 음악으로도 탄생한 ‘들장미(Heidenröslein)’는 요한 볼프강 폰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 1749~1832)가 쓴 시로, 그의 자전적 고백이기도 하다. 괴테는 20대 때 스트라스부르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하면서 사랑에 빠졌고, 그때의 기억과 마음을 이 시로 남겼다. 들에 핀 싱싱하고 빨간 장미 같은 소녀를 본 소년은 욕망에 휩싸이고, 그 소유의 의지와 유혹을 향해 장미로 상징된 소녀는 가시로 위협하는 척 하면서 자신을 영원히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바람과 불안감을 드러낸다. “한 소년이 보았네, 들에 핀 장미”로 시작하는 들장미의 노래는 알고 보면 사랑에 대한 욕망과 불안감이 점철된 남녀가 주고받는 밀어이자, 사랑의 티키타카였던 것이다.

괴테의 ‘들장미’ 안에 나타난 것처럼 장미의 가시는 이중성을 안고 있다. 누군가를 공격하는 날선 칼날인 동시에 ‘나를 잊지 말아요’를 표현하는 가장 강력한 언어가 된다.

발레에도 장미의 가시가 중요한 역할을 하는 작품이 있다. 장미 가시에 찔려 100년 동안 잠든 공주의 이야기 ‘잠자는 숲속의 미녀(The Sleeping Beauty)’(1890)이다. 표트르 일리치 차이콥스키(Pyotr Il'yich Tchaikovsky,1840~1893)가 음악을 작곡했고, 마리우스 프티파(Marius Petipa,1819~1910)가 안무를 맡아 탄생한 작품이다. 프랑스 작가 샤를 페로(Charles Perrault,1628~1703)가 쓴 원작에서는 공주가 물레의 바늘에 찔려 깊이 잠들지만 발레작품에선 장미의 가시가 그 역할을 한다. 사건은 카라보스가 들고 온 장미 한 다발을 오로라 공주가 덥석 받아들면서 벌어진다.

‘잠자는 숲속의 미녀’ 1막에서 가장 유명한 장면도 장미꽃과 함께 춤을 추는 ‘로즈 아다지오(rose adagio)’이다. 열여섯 살에 처음으로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낸 오로라 공주가 네 명의 왕자에게 청혼을 받는 장면이다. 이 장면에 ‘로즈 아다지오’라는 이름이 붙은 이유는 네 왕자들이 한 명씩 장미꽃을 내밀고, 그 꽃을 받아든 공주가 아다지오의 음악에 맞춰 우아하고 사랑스러운 자태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이 장면에서 오로라 공주가 중요하게 선보이는 발레 동작은 ‘애티튜드(Attitude)’이다.

애티튜드는 한 다리를 세워서 몸의 중심을 잡고, 다른 다리는 앞이나 뒤로 뻗되 무릎을 살짝 구부려서 90도 이상 드는 동작이다. 언뜻 듣기에는 그다지 어려운 동작으로 여겨지지 않겠지만, 애티튜드는 균형감각, 호흡, 유연성, 상승 에너지가 응축된 발레 동작의 백미 중 하나이다. 애티튜드는 프랑스어로 ‘자세, 태도, 마음가짐’이라는 뜻을 갖고 있는데, 이 동작에 이런 이름이 붙은 것도 동작이 완성됐을 때 느껴지는 아름다운 자태 때문일 것이다.

로즈 아다지오 장면은 오로라 공주가 네 명의 왕자들의 손을 한 명씩 잡으면서 애티튜드 자세로 한 바퀴씩 도는 걸로 마무리된다. 어리지만 공주라는 신분에 걸맞게 기품을 유지해야 하고, 프러포즈를 받고 있지만 이중에서 누군가를 선택해야 하는 사람으로서 갖는 조마조마하고 떨리는 감정이 이 동작 안에 녹아있다.
장미꽃처럼, 로즈 아다지오의 애티튜드(attitude)
사진1> 발레 <잠자는 숲속의 미녀The Sleeping Beauty> 1막 중 ‘로즈 아다지오’ @Bolshoi Ballet

로즈 아다지오는 낭만적이고 사랑스러운 장면일 뿐 아니라, 주역 무용수가 돼야만 출 수 있기 때문에 모든 여성 무용수들이 꼭 한번 해보고 싶은 선망의 춤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 장면은 종종 다른 작품들 안에서 패러디가 되기도 한다. 대표적인 예가 영국의 로열발레단에서 올린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Alice's Adventures in Wonderland)’(2011)이다. 이 작품 안에서 사람들을 공포에 떨게 하는 군주, 하트의 여왕은 트럼프 신하들과 로즈 아다지오를 추면서 익살스러운 분위기를 연출해낸다. 트럼프들은 장미 대신 여왕에게 쿠키를 건넨다. 원작의 사랑스러운 모습이 유머러스한 장면으로 재탄생한 것이다. 하트의 여왕 역할을 맡은 한 여성 무용수는 이 장면 덕분에 로즈 아다지오를 춰보고 싶은 소원을 풀었다고 너스레를 떨기도 했다.
장미꽃처럼, 로즈 아다지오의 애티튜드(attitude)
사진2> 발레 <이상한 나라 앨리스Alice's Adventures in Wonderland> @Royal Ballet

오로라 공주가 장미의 가시에 찔려 깊은 잠에 빠졌다는 건 사랑의 고통을 겪으면서 눈을 뜨고 숨을 쉴 수 없는 삶이 되어 그 고통의 심연에 100년 동안 가라앉았다는 것을 은유한 게 아닌가 생각해본다. 가시는 장미를 보호하고 매혹적으로 만들지만 잘못 사용하면 상대방을 100년의 잠 속으로 빠지게 하는 독이 된다. 그래서 무엇보다 가시를 다루는 우리의 애티튜드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나 자신에게 겨눠진 가시에 대해서는 다른 애티튜드가 필요하다. 가시는 아프지만, 돌아보면 인생의 중요한 것들은 평안과 안정이 아니라 가시에 찔리는 고통 속에서 배운 것이 많았다.

‘삶의 길에서 가장 가까운 이들이 사랑의 이름으로 무심히 찌르는 가시를 다시 가시로 찌르지 말아야 부드러운 꽃잎을 피워낼 수 있다고. (중략) 사랑하는 이여 이 아름다운 장미의 계절에 내가 눈물 속에 피워 낸 기쁨 한 송이 받으시고 내내 행복하십시오.’ 이해인 수녀님의 시 ‘6월의 장미’에서 장미는 행복의 다른 이름이 되고 있다. 때마침 서울에서는 에드워드 호퍼(Edward Hopper)와 라울 뒤피(Raoul Dufy)의 전시가 열리고 있다. 에드워드 호퍼가 파리의 모습을 담은 ‘6월의 오후 또는 봄의 오후’(1907), 라울 뒤피의 ‘장미 꽃다발’(1943)이 풍기는 평화로운 풍경과 색감을 이해인 수녀님의 시구 사이로 떠올려본다. 오로라 공주의 ‘애티튜드’처럼 우아한 자태를 배우고, 장미의 가시가 아닌 향기를 남기는 6월을 꿈꾸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