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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단비
    이단비 33(지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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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망치로 머리를 맞으면 이런 일이…파괴와 창조의 변주였던 '해머'

    정신을 잃던가, 정신을 차리던가. 해머(망치)로 머리를 맞으면 이 둘 중 하나가 일어난다. 해머는 이렇게 이중적인 속성을 갖고 있다. 알렉산더 에크만은 굳어진 우리의 자아를 부수고 서로를 다시 연결하자는 의미를 이 작품 <해머>에 담았다고 밝힌 바 있다. 결국 해머는 파괴를 함으로써 새로운 것을 창조하고, 끊어냄으로써 다시 잇는 힘과 의식을 상징하고 있다. 그래서 해머는 성물(聖物)이다. 마치 십자가를 걸듯 조심스럽고 소중하게 해머를 무대 한편에 거는 모습으로 이 공연이 시작되는 것도 그 때문이고, 2막에서 타인과의 연결이 끊어지고 모든 관계가 무너졌을 때 조용히 해머를 거둬가는 장면이 들어간 것도 그 때문이다. 우리의 해머는 지금 어디에 걸려 있는가.개성과 자유가 공존하던 시대, 관객까지 전염시킨 공동체 감성이번 작품의 제목과 의미는 알렉산더 에크만의 안무작들이 갖는 특징과도 연결되어 있다. 스웨덴 출신의 안무가 알렉산더 에크만은 21세라는 젊은 나이에 스웨덴의 쿨베리 발레단에서 안무가로 데뷔한 이래로 파격적인 연출과 비주얼 쇼크의 작품을 선보이면서 주목받아 왔다. 무대 위에 물 5천 리터를 부어서 진짜 호수를 만든 <백조의 호수>와 4만 개의 공을 쏟아내며 춤과 놀이를 결합한 <플레이>는 환상적인 미장센으로 유명한 작품이다. 하지만 시각적 연출만 화려했다면 알렉산더 에크만이 지금처럼 명성을 얻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의 작품에는 ‘위트 안에 담긴 통렬함’이 있다. ‘무용은 웃을 수 있어야 한다’는 작품 철학을 가지고 있는 그는 사람들을 즐겁게 만들지만 결코 그 웃음이 가벼운 것으로 지나가게 내버려두지 않는다.이번

    2025.11.18 15:56
  • 100년의 시간을 공유하는 춤, 춤을 만드는 과정도 춤이다!

    새로운 100년을 맞이하는 기대 때문인지 1900년에는 역사에서 기억할 만한 여러 가지 일들이 일어났다. 발레가 안겨준 환상에 반기를 들며 현대무용이 등장한 것도 1900년의 일이다. 그런데 춤은 결국 하나여서 오래지 않아 발레와 현대무용은 손을 잡고 춤이 본질적으로 추구하는 것을 향해 나아갔고, 춤에 대한 질문과 혁신은 지금도 멈추지 않고 있다.국립현대무용단에서 김성용과 윌리엄 포사이스의 더블 빌로 선보인 이번 공연도 그 점을 보여준다. 무대 위에서 보이는 저 결과는 춤을 추고 만드는 사람들을 위한 실험이자 후대를 위해 춤을 기록하고 기억하기 위한 과정의 리서치였기 때문이다. 이번 무대는 김성용 안무작의 <크롤(Crawl)>은 그가 연구한 춤 메소드 ‘프로세스 인잇(Process Init)’과, 윌리엄 포사이스 안무작 <하나의 편평한, 복제된(One Flat Thing, Reproduced)>은 인터랙티브 아트워크 ‘싱크로너스 오브젝트(Synchronous Objects)’와 연결되어 있다. 각각 현대무용과 발레를 기반으로 성장한 안무가이지만 춤의 실험과 리서치라는 틀에서 같은 방향을 바라봤다는 점도 흥미롭다.함께, 동시에, 춤의 동기화를 향해이번 더블 빌 공연의 첫 무대를 장식한 윌리엄 포사이스의 <하나의 편평한, 복제된>은 2000년 프랑크푸르트에서 첫선을 보인 이후 지금까지도 춤의 연구와 교육에서 늘 이야기되고 재공연되는 작품으로 남았다. 14명의 무용수가 20개의 테이블을 밀고 들어와 테이블의 사이, 테이블의 위아래의 공간에서 춤의 다양한 형태가 이어지며, 테이블과 인간과 몸은 공간과 움직임의 형태와 형식으로 기하학적인 미와 에너지를 만들어낸다. 그 자체로도 재밌게 볼 수 있지만 이

    2025.11.11 14:54
  • 살아 있는 시체의 춤, 부토의 황홀

    1913년 5월 29일, 프랑스 파리의 샹젤리제 극장에서는 공연 도중 사람들의 야유와 항의가 빗발치고, 관객들끼리 멱살잡이가 일어나며 경찰까지 들이닥치는 희대의 사건이 일어난다. 발레 뤼스의 신작 <봄의 제전>이 초연되던 날의 모습이다. 당시 상황은 난장판이었지만 이 작품의 음악도, 춤도, 위대한 예술적 유산이 되어 지금까지도 수많은 예술가들에게 영감의 기폭제로 작용하고 있다. 창작자들이 자신만의 해석으로 새로운 <봄의 제전>을 내놓는 건 일종의 예술적 의식과도 같다. <봄의 제전>이 이번에는 부토로 탄생했다. 이번 <봄의 제전>은 부토를 이끄는 양대 예술단체 중 하나인 다이라쿠다칸(大駱駝艦)의 한국인 무용수 양종예가 안무와 연출을 맡고 직접 출연까지 한 작품이다. (2025년 10월 28일~11월 3일)6년 만의 오픈, 빈 항아리 ‘코츄텐’ 안에 담은 부토매해 도쿄 현지인들이 가장 살고 싶은 동네 1위로 꼽히는 키치조지. 다이라쿠다칸은 키치조지에 터를 잡고 있다. ‘코츄텐(壺中天)’이라는 이름을 가진 다이라쿠다칸의 이 공간은 연습실이자 부토 공연장이다. ‘코츄텐’은 항아리라는 뜻을 갖고 있다. 머리를 모두 밀거나 때로는 나신의 상태로 춤을 추며 자신의 빈 몸에 춤과 혼을 채워 넣는 부토의 정신이 이 공간의 이름 안에서도 드러난다. <봄의 제전> 공연 첫날, 1시간 전부터 관객들은 코츄텐 앞에 줄을 서기 시작했다. 일본 내에서는 부토의 마니아층이 형성돼 있을 뿐 아니라, 가까이에서 날 것 그대로의 춤과 호흡을 느낄 수 있는 코츄텐의 공연을 좋아하는 관객층이 탄탄하기 때문이다. 특히 이번 공연은 코로나로 인해 6년간 문을 닫았던 코츄텐

    2025.11.07 09:52
  • 세상을 '묶는' 아시아 발레

    ‘예술은 국경을 넘는 만국 공통어’라는 흔한 명제는 발레의 흐름과 생명력만 살펴봐도 고개가 끄덕여진다. 16~17세기 이탈리아와 프랑스에서 시작된 발레는 유럽만의 문화 혹은 정치와 사교의 목소리로만 머물지 않고 19세기에는 러시아로, 그리고 20세기에 와서는 전 세계를 관통하는 춤 언어가 되었다. 나라마다 고유의 민속춤이 있지만 유독 발레가 세계에 통용되는 건 발레만이 갖고 있는 특유의 몸 사용법과 미, 그리고 종합예술로서 발레가 갖는 성격 때문일 것이다. 그사이 무용학자들 사이에서는 발레를 가장 '세계화된 무용(Globalized Dance Form)'으로 바라보며 발레의 예술성과 그 이면의 다양성에 대한 연구를 계속해 왔다. 아시아의 발레는 그런 세계화, 예술성, 다양성의 복합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 때마침 지난 9월 24일, 아르코예술극장 무대에는 ‘월드발레 아시아스페셜’이라는 타이틀로 한국, 일본, 중국의 발레단이 함께한 발레 갈라 공연이 올라갔다. 제18회 K-Ballet World(서울국제발레축제) 행사 중 하나였다. 한·중·일의 주요 발레단이 모였고 장애인을 위한 무용 음성해설과 터치투어가 이뤄진 공연인 만큼 이번 무대는 아시아 발레의 흐름과 21세기 발레의 새로운 면모를 생각해 보는 기회가 되었다.함께 성장한 한국과 일본의 발레이번 갈라 공연에 참가 예술단체는 우리나라의 국립발레단과 유니버설발레단, 와이즈발레단, 일본의 도쿄시티발레단, 중국의 상하이발레단으로 한·중·일 3개국이 중심이 돼서 파드되와 솔로 공연을 선보였다. 현재 한·중·일 외에도 홍콩, 대만, 필리핀, 싱가포르 등 여러 아시아 국가들에서 발레단이 세워지고

    2025.10.01 15:03
  • ‘오늘의 발레’를 돌아보는 돌잔치, 현대인의 초상과 피아졸라의 영감

    과거에는 아기들이 첫돌을 넘기지 못하고 사망하는 경우가 허다해서 돌잔치는 중요한 의미를 가졌다. 1년을 잘 버텨주었다는 고마움과 안도감, 그리고 앞으로도 건강하게 잘 살아달라는 기도의 마음이 그 안에 들어있는 것이다. 서울시발레단이 첫돌을 맞이했다. ‘발레 플레이그라운드’라는 타이틀로 8월 한달간 진행된 1주년 기념행사들에도,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를 뜨겁게 달군 더블빌 공연에도 돌잔치의 의미가 담겨있다. 공공예술단체의 역할 중 하나는 시대의 예술과 춤을 견인하고 시대의 담론을 만들어 나가는 데 있다. 이번 더블빌 공연은 1년간 얼마나 성장했는지 돌아보고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지 가늠하는, 즉 미래를 예측하는 ‘돌잡이’나 다름없기 때문에 더 주목해서 바라보게 되었다.비트 사이로 춤추는 불안과 희망, 현대인의 초상을 그린 발레첫 무대를 장식한 작품은 유회웅 안무작 <노 모어(No More)>였다. 서울시발레단의 창단 사전공연에서 선보인 같은 제목의 작품을 발전시키고 재정비한 작품이다. 공연은 한 주의 요일들을 차례로 말하다가 먼데이(월요일)를 반복적으로 읊는 내레이션으로 문을 연다. 월요병을 연상시키는 이 내레이션은 이 작품의 메시지를 명료하게 간파하게 만든다. 현대인의 일상은 종종 무기력과 사회적 강압 사이에서 줄다리기하는 월요일의 반복이기도 하다. ‘노 모어(No More)’는 ‘기껏해야, 겨우, 이것뿐’이라는 부정적인 뉘앙스를 갖고 있는 단어이지만, 이 작품은 이 단어의 촉으로 우리의 무기력함과 불안감에 저격하며 결국 희망을 건넨다.그런데 작품의 표현방식은 일종의 ‘쇼’에 가깝기도 하다. 최

    2025.08.27 15:04
  • 박세은이 이끈 파리오페라발레 에투알 갈라, 우아함의 정석을 보여주다

    17세기 중반 이후 프랑스 귀족들 사이에서 가장 ‘힙한’ 사교댄스는 미뉴에트였다. 4분의 3박자에 맞춰 경쾌하면서도 동시에 자태가 흐트러지지 않아 흥겨우면서도 귀족으로서의 이미지도 다치지 않는 춤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루이 14세(Louis XIV, 1638~1715)는 미뉴에트보다는 느리면서 묵직한 쿠랑트를 추면서 왕의 위엄을 드러냈다. 이 춤들이 지금 우리가 보는 발레의 근간이 되었다.루이 14세 시절, 정치적 이유이든 놀이의 이유이든 발레는 중요한 문화였다. 그때 프랑스 귀족들이 추던 그 춤, 그 발레는 ‘프렌치 노블 스타일’이라고도 불렸다. 발레에 진심이었던 귀족의 문화에서 전문무용수들의 영역으로 발레의 입지가 변화된 건 루이 14세가 세운 아카데미 때문이었다. 그 아카데미가 지금의 파리오페라발레단이다. 이번 내한공연을 준비한 파리오페라발레단 무용수들은 ‘프랑스식 접근을 보여주는 공연’, ‘프랑스 무용의 풍경’을 전할 거라는 의지를 보였다. 프랑스식 춤의 특징이란 결국 뿌리를 찾고 찾아 올라가 보면 프렌치 노블에서 중시했던 우아한 자태일 것이다. 그것이 우리가 다른 유수 해외발레단과 달리 파리오페라발레에서 가장 기대하게 되는 지점이다.파리오페라발레를 읽는 세 가지 키워드아메리칸발레시어터, 영국 로열발레에 이어서 프랑스 파리오페라발레의 내한으로 어느 때보다 뜨거운 한 해를 보내고 있다. 자연스럽게 각 발레단의 특성과 레퍼토리를 나란히 놓고 바라보며, 그 차이점을 발견하고 음미하게 되는데 이번 파리오페라발레단 내한공연은 세 가지 지점에서 특성과 차별점을 읽어본다.첫째, 프렌치 노블의 전통은 파리오페라발레 무용

    2025.08.01 16:34
  • 카뮈의 글을 읽는 여름, 찬란한 부조리 속 ‘주테 앙 투르낭’

    여름이다. 어느 날은 햇볕이 날카로운 화살처럼 대기를 뚫고 살갗 위에 앉고, 어느 날은 비바람이 통곡을 하며 휘몰아친다. 이것이든 저것이든 여름은 움츠러들지 않고, 있는 힘껏 계절의 위용을 자랑한다. 변덕스러운 날씨로 장난질하는 여름의 한가운데 서서 알베르 카뮈(Albert Camus, 1913~1960)의 책 『결혼 · 여름(Noces suivi de L'Été)』을 읽는다. “우리는 사랑과 욕망을 찾아 걸어 나간다. 교훈이라거나, 이른바 위대함이 요구되는 쓰라린 철학을 구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태양, 입맞춤, 야생의 향, 이 이외의 모든 것들이 헛되게 여겨진다.”청년 시절의 카뮈가 쓴 문장들 속에서 철학 대신 여름의 후끈한 공기와 야생의 향에 푹 빠져본다. 카뮈가 청춘을 “탕진에 가까운, 성급한 삶으로의 돌진”이라고 표현한 것처럼, 그렇게 청춘을 향해 돌진하고 그렇게 탕진한다. 청춘은 짧기 때문에 화려하다. 꽃은 청춘을 닮아 잠시 인생과 입맞춤하며 태양처럼 빛나고 야생의 향을 피워올린다. 꽃은 그렇게 감각적 이미지로 청춘을, 청춘의 탕진을 드러낸다. 그 모습을 발레로 표현한다면 어떤 모습일까. 작품 속에서 ‘주테 앙 투르낭(jeté en tournant)’ 동작을 볼 때 종종 그런 느낌을 받곤 한다. 마치 꽃이 피듯 일순간 움직임과 에너지를 화려하게 폭발시키고 땅으로 내려오는 동작이기 때문이다.주테 앙 투르낭은 하늘 높이 몸을 띄우면서 회전을 하되, 솟아오른 정점에서 양쪽 다리를 교차한 후에 땅에 착지하는 동작이다. 주테는 양다리를 앞뒤로 길게 스트레칭하며 공중에 몸을 띄우는 동작이고, 투르낭은 회전의 동작을 뜻하며, 이 두 동작을 하나로 합친 것이 주테 앙 투르

    2025.07.22 17:44
  • 서로의 심장을 맞대는 탱고의 시작점 '아브라소'

    그의 손을 잡았다. 심장이 뛰었다. 손과 심장이 하나로 연결된 것 같았다. 사랑에 빠져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런 경험이 있지 않을까. 한용운의 시구를 빌어서 이야기하자면, 손을 잡는 건 "운명의 지침을 돌려놓는 날카로운 추억"이다. 손을 잡는 행위를 통해 친구는 연인이 되고, 적은 동지가 된다. 이 지점에서 스위스 작가이자 철학자인 드니 드 루즈몽(Denis de Rougemon, 1906~1985)의 저서 『손으로 생각하다(penser avec les mains)』가 떠올랐다. 책의 내용은 우리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을 담고 있지만 제목의 상징성이 매력적이라 종종 이 제목이 차용되는 걸 발견한다. 특히 예술에서 그렇다. 예술가에게 있어서 ‘손으로 생각하는’ 경우는 빈번하게 일어난다. 탱고를 추는 사람에게도 그렇다. 탱고에서는 마주 잡은 손과 가슴을 통해 상대방의 의도를 읽고, 신호를 주고받으며 두 사람만의 춤을 만들어 나간다. 탱고에서 손은 또 하나의 심장이다.그런데 이렇게 낭만적으로 들리지만, 처음 탱고를 배울 때는 낭만이 아니라 남사스러운(?) 현실에 마주친다. 아르헨티나 탱고를 추기 위해서 두 사람이 함께 취하는 기본자세는 '아브라소(abrazo)'이다. 스페인어로 ‘포옹’을 뜻하는 말로, 한 손은 마주 잡고 다른 손으로는 서로의 등을 안는 자세를 가리킨다. 특히 가슴을 밀착하는 포옹의 자세는 ‘아브라소 세라도(abrazo cerrado)’라고 한다. 언젠가 꼭 한번 아르헨티나 탱고를 배워보겠다는 결심과 호기심은 이 아브라소 때문에 번번이 그 문턱을 넘지 못했다. 외간 남자를 꼭 껴안고 춤을 춰야 한다니, 이렇게 해괴망측할 수가! 탱고와의 인연은 꽤 오래되었는데도 이제야 탱고를 배우

    2025.06.05 09:29
  • 아무도 아닌 자들의 마지막 무도회

    로마제국의 시인 호라티우스의 시집 『오데즈(Odes)』에 등장하는 ‘카르페디엠(carpe diem)’은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하라’는 뜻을 갖고 있다. 그 때문에 종종 ‘워라밸’과 ‘소확행’과 엮이지만 본래 ‘카르페 디엠’은 ‘죽음을 기억하라’는 ‘메멘토 모리(Memento mori)’와 짝을 이뤄 이야기되는 경구이다. 이 두 경구는 흑사병이 창궐했던 14세기 중세의 유럽을 대표하는 말이기도 하다. 죽음이 가까이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죽음과 삶의 의미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21세기 현재 죽음은 우리에게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을까. 마르코스 모라우(Marcos Morau)는 <죽음의 무도: 내일은 물음이다>를 통해 이 점에 대해 말하고 있다.죽음 앞에 모두가 평등하다공연 당일, GS아트센터의 로비에 마련된 무대에는 검은 천의 장막이 드리워졌다. 공연 시간이 다가오자 줄을 선 관객들 앞에 검은 의상에 헤드폰과 장대 마이크를 든 무용수가 천천히 다가왔고, 함께 장막 안으로 입장한다. 죽음을 상징화한 모습이었다. 마르코스 모라우는 이 작품을 ‘죽음의 춤’이라고 불리는 중세 시대의 토텐탄츠(Totentanz)에서 모티브를 얻어 만들었다. 토텐탄츠는 죽음을 상징하는 해골이 춤을 추며 산 자를 데려가는 모습을 담은 그림을 가리킨다. 프랑스어로 당스 마카브르(Danse macabre)라고도 하기 때문에 죽음에 대해서 다루는 예술을 마카브르 예술이라고 부른다. ‘죽음의 춤’은 그림을 넘어서서 지금까지도 다양한 예술 형태로 재생산되고 있다.토텐탄츠는 종종 교회의 벽화로 나타났다. 죽음의 사신인 해골이 교황과 황제, 각종 직업의 시민

    2025.05.19 13:52
  • 미쳐서 걷다가 더없는 행복을 만난다, 광기의 영감에서 관계 맺음으로

    익숙함은 거대한 벽이다. 낯선 것보다 무겁고, 딱딱하다. 적어도 무언가를 창작해서 내어놓아야 하는 예술가들에게는 그렇다. 그 무겁고 딱딱한 것을 잘게 부수고, 말랑말랑하게 매만져서 내가 말하고자 하는 형상으로 빚어내는 것, 그것이 예술가의 숙명이다. 여기, 수많은 사람들이 오래 듣고, 말 그대로 익숙해진 음악이 있다. 그만큼 단단했던 그 음악들이 말랑한 질감을 거치고 춤의 언어를 통해 다른 음악이 되었다. 서울시발레단과 안무가 요한 잉거가 지난 9일 서울 세종문화회관 무대에 올린 <워킹 매드>와 <블리스>는 음악과 춤의 새로운 관계 맺기를 보여준다.벽 사이에서 인간을 읽는다오는 18일까지 이어지는 이번 무대는 요한 잉거의 대표 안무작 두 편으로 구성되었다. 첫 무대를 장식한 <워킹 매드>는 소리에 대한 이미지가 정형화되다시피 한 음악을 안무가가 어떻게 춤을 관통시키며 해체하고 재조립할 수 있는지 명확하게 보여준 작품이다. <워킹 매드>를 이끈 주요 음악은 모리스 라벨의 <볼레로>이다. <볼레로>는 두 개의 주제 멜로디를 중심으로 악기들이 소리가 하나씩 더해지고 반복되는 단순한 구조를 갖고 있다. 점진적으로 쌓인 그 소리들은 마지막 순간에 폭발한다. <워킹 매드>의 움직임은 그 소리가 명령하는 구도에 따라가지 않고 전혀 다른 접근을 보여준다. 연극적 요소를 입혀 단순한 리듬 사이에 복잡한 인간의 감정을 촘촘하게 끼워 넣은 것이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 요한 잉거는 몇 가지 예술적 전략을 펼쳤다. 가장 주요한 건 무대세트로 사용한 거대한 벽이다.<워킹 매드>에서 벽은 단순히 서 있기만 한 사물이 아니다. 이동하고

    2025.05.11 16:21
  • 눈에서 혼으로, 흑백 플라멩코 안에 담긴 두엔데

    그분이 오셨어! 우리는 하고 있는 일이 무언가에 씌인 듯 술술 풀릴 때 위트를 담아 ‘그분’의 존재에 대해서 이야기하곤 한다. 일상에서 '접신'의 경험을 하는 것이다. 이런 신내림과 신지핌의 상태는 예술가에게는 더 친숙하다. 고대에 춤은 제의의 하나였으며 신에게 홀려 자신의 영혼을 잃게 될까봐 두려운 마음에 추었던 것이기도 했다.힘차게 땅을 밟고 구르는 플라멩코 무용수들의 표정은 마치 신과 합일을 기도하는 의식 같아 보인다. 춤을 추며 마치 접신된 것처럼 무아지경의 상태에 들어가는 것. 그것을 플라멩코에서는 두엔데(Duende)라고 부른다. 플라멩코는 집시의 혼을 담은 춤이다. 집시들은 걸음마를 배우기 전에 플라멩코를 익힌다는 말이 있다. 오랜 세월, 어딘가에 정착할 곳 없이 떠다닌 그들이 잠시 비와 추위를 피해 기거한 곳에서 자신들의 신세를 토로하며, 어디서 말하지 못하는 말을,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말을, 플라멩코 안에 담았다.과연 이런 애환과 두엔데가 현대적으로 정비된 프로시니엄 극장 안에서, 신화를 잃어버린 21세기라는 시간 안에서, 관객을 상대로 하는 정제된 공연 안에서 어떻게 표출될 것인가. 플라멩코의 원형의 모습에서 이 작품은 얼마나 창의적으로 확장된 것이고, 또 얼마나 멀고 가까운가. 마르코스 모라우(Marcos Morau)와 스페인 국립플라멩코발레단(Ballet Nacional de España)이 만나 작업한 <아파나도르(Afanador)>는 이런 질문을 품고 만난 작품이다. 색이 없이 정지된 이미지 안에서 플라멩코의 혼을 읽다 사진이라는 정지된 이미지 안에 두엔데의 몰아상태를 담아낼 수 있을까. 색이 없는 곳에서도 두엔데는 피어나는가. 이런 의구심은

    2025.05.02 10:15
  • 발레의 림버링은 봄의 나른함을 닮았다

    일 년 중 단 열흘 간의 화려한 공연을 마치고 벚꽃이 다시 나무줄기 사이로 몸을 감췄다. 이제 완연한 봄이 찾아왔다. 봄의 아지랑이는 마치 19세기 낭만발레에서 보이는 몽환적인 환상의 이미지와 닮았다. 봄날의 나른하고 포근한 날씨와 분위기 때문일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봄이 되면 누구든 봄볕 아래 꾸벅꾸벅 졸게 된다. 이탈리아 작곡가 안토니오 비발디(Antonio Vivaldi, 1678~1741)가 1725년 작곡한 <사계> 중 '봄' 2악장에는 나른한 봄볕에 양치기가 졸고 있는 모습이 담겨 있다. 라르고로 연주되는 바이올린의 선율은 춘곤증이 밀려오는 날의 전경을 귀로 들려주는 것이다.늘어진다는 것은 춤을 추는 사람들에게 팽팽하게 당기는 것 못지않게 중요하다. 근육을 충분히 늘려주는 과정이 부상의 위험을 줄여주고 더 확장되고 자유로운 움직임을 가능하게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발레에서는 유연함이 팽팽함을 가능하게 만들고, 늘어지는 것이 바짝 호흡을 위로 올리는 토대가 된다. 종일 책상에 앉아서 어깨를 긴장한 채 컴퓨터와 의자와 한 몸이 되어 일하는 직장인들에게도 몸을 늘려줄 시간은 중요하다. 기지개를 켜는 건 앞의 시간을 끊고 공기를 바꿔서 다음 시간을 만나는 일이다. 발레에도 기지개가 있다. 림버링(limbering)이다. 발레 클래스는 바(bar)를 이용한 바 워크와 바를 치우고 센터에서 다양한 동작을 연습하는 센터 워크로 구성돼 있다. 바 워크를 마친 후 몸을 최대한 늘려 유연하게 만드는 과정을 발레에서는 림버링이라고 부른다. 림버링은 공연이나 본격적인 리허설과 센터 워크에 앞서서 몸을 준비시키는 과정이다.림버(limber)는 나긋나긋하고 유연하다는 뜻을 갖고 있으므

    2025.04.29 10:12
  • 당신의 눈동자에 춤을 청합니다...탱고의 시작점 까베세오

    윌리엄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 1564~1616)의 희곡 <로미오와 줄리엣>은 16세기에 쓰였지만 지금까지도 예술 안에서 수많은 옷을 갈아입으며 마르지 않는 영감의 원천이 되고 있다. 그래서 어떤 장르의 작품이든 누구나 기억에 남는 로미오와 줄리엣 하나쯤은 있을 법하다. 1978년, 영화를 통해 스타덤에 오른 올리비아 핫세(Olivia Hussey, 1951~2024)는 영원한 줄리엣으로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아있다. 개인적으로는 프로코피예프(Sergei Prokofiev, 1891~1953)의 발레 음악에 맞춰 춤을 춘 알렉산드라 페리(Alessandra Ferri, 1963~)가 잊히지 않는 줄리엣이다. 로미오로는 바즈 루어만이 감독한 1996년 영화 속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Leonardo DiCaprio, 1974~)가 주목받았다. 이 영화 속에서 가장 압권인 장면은 로미오가 캐플릿가의 무도회에 몰래 숨어 들어갔다가 줄리엣과 마주쳐 첫눈에 반하는 장면이 아닐까 싶다. 바즈 루어만 감독은 로미오와 줄리엣이 수족관을 사이에 두고 투명한 유리 너머로 서로의 눈빛을 교환하는 신비로운 연출을 끌어냈다.발레 <로미오와 줄리엣>에서도 그렇다. 캐플릿가의 무도회장에서 마주친 로미오와 줄리엣은 두 사람의 시간만 정지한 듯, 웅장한 음악과 군무 사이로 서로를 한참 동안 응시하며 서 있다. 이 장면을 본 사람은 누구나 말 한마디 없이도 오로지 눈빛만으로 그 둘이 서로 반했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된다.탱고에서도 눈빛이 말보다 강한 순간이 있다. 마치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이 눈빛의 교환이 없으면 춤 자체가 이뤄지지 않기 때문이다. 탱고를 추기 위해 모이는 곳을 밀롱가(milonga)라고 하는데 이 밀롱가에서는 말 대신 눈빛으로 춤을 신청하고 받아들이는 문화가 있다. 그것을

    2025.04.03 08:50
  • 잊어라, 깨워라, 춤을 춰라! 몸과 감각의 문을 연 10년의 춤

     10 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 말이 있다. 10년의 세월이 주는 위력을 가늠하게 하는 말이다. 데카(deca), 10년을 뜻하는 말과, 당스(dance), 춤을 뜻하는 말이 만나서, 안무가 오하드 나하린(Ohad Naharin, 1952~)의 예술적 자취가 하나의 작품으로 탄생했다. 10년의 위력을 담은 <데카당스>는 서울시발레단과 함께 이번 시즌의 문을 힘차게 여는 열쇠가 되었다. 컨템퍼러리발레를 지향하는 공공발레단의 정체성과 방향의 키가 이제 <가나가와 해변의 거대한 파도> 속 거칠고 날카로운 물살을 헤치고 제 항로에 접어들고 있다. <데카당스>는 그런 긍정의 신호를 보여준 공연이기도 했다. 춤으로 부르는 고향의 노래 "쉐바스하마임 우바아레츠!” <데카당스>는 오하드 나하린의 안무작 8편 중에서 하나씩 그 조각들을 모아서 또 하나의 레퍼토리로 만든 작품이다. 공연 전반부부터 강렬하다. 반원형의 형태로 배치한 의자에서 검정 재킷과 흰색 셔츠를 입은 무용수들이 역동적인 움직임을 선보이는 장면은 그의 시그니처나 다름없다. 이때 무용수들은 다같이 "쉐바스하마임 우바아레츠(Shebashamaim Uva'aretz)"라는 말을 반복적으로 쏟아내며 노래를 한다. 히브리어로 ‘하늘과 땅에’라는 뜻이다. 왜 이 말을 무대 위에서 외치는 것일까. 이 지점에서 오하드 나하린의 고향이 이스라엘이란 점을 떠올릴 필요가 있다. 이 노래는 이스라엘인이 유월절에 부르는 노래 ‘에하드 미 요데아(Echad Mi Yodea)’의 한 부분이다. ‘에하드 미 요데아’는 ‘누가 하나(님)를 아는가?’라는 뜻을 갖고 있다. 오하드 나하린은 어릴 때부터 읽고 불렀던 고향의 노래를 자신의 작품 안

    2025.03.16 09:49
  • 동작의 근원이자 발레의 씨앗 '탕뒤'

    고대 로마 시대에는 3월이 한 해의 시작이었다고 한다. 율리우스력과 현재 전 세계에서 보편적으로 사용하는 그레고리력이 채택되기 전까지 3월은 정월이었고, 춘분이 새해의 첫날이었다. 그 이유는 자명하다. 3월은 곡식의 종자를 심는 달이기 때문이다. 3월을 뜻하는 영어 단어 ‘마치(March)’도 로마신화에서 농업의 신이자 전쟁의 신이기도 한 마르스(Mars)에서 따온 명칭이다. 로마에서는 자신들의 신화 속에서 제우스 격인 유피테르보다 마르스를 더 숭배했다고 알려져 있는데, 최고의 권위보다는 삶의 기반이자 근간을 더 중시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씨앗을 심는 건 농사에서뿐 아니라 어떤 일에서도 미래를 바라보고 오늘을 충실히 사는 작지만 큰 행위이다. 그래서 3월은 중요하다. 발레에서도 3월과 같은 훈련 동작이 있다. 기술적으로 난도가 높고, 화려한 동작들을 구사할 수 있는 몸을 만들기 위해 씨앗을 심고 기초를 탄탄하게 만드는 핵심 동작 둘, 플리에(plié)와 탕뒤(tendu)이다. 턴아웃 상태로 무릎을 구부려서 내려갔다 올라가는 플리에는 하늘로 향해 날아오를 수 있게 만드는 근원이다. 화살을 멀리 날아가게 만들기 위해 활시위를 뒤로 힘껏 당기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관련 칼럼] 무릎을 구부렸다 펴는 '플리에'...여기에 발레의 모든 게 녹아있다그렇다면 탕뒤는 어떤가. 발레에서는 다리를 힘차게 차거나 들어 올리는 역동적이고 확장된 움직임을 큰 동작, ‘그랑(grand)’이라고 부르는데 그랑 동작들을 하기 위해서 탕뒤로 훈련하는 게 필수적이다. 오죽하면 발레에서는 ‘모든 것은 탕뒤에서 시작되는가?(Everything starts with a tendu?)’라는 말이 있을 정도

    2025.03.12 10:27
  • 걸음만으로 완성되는 춤 '탱고', 그 용감한 걸음마를 시작했다

    움찔움찔, 어린 조카가 엉덩이를 들썩거리다가 조금씩 벽을 잡으면서 일어섰다. 얼마 뒤에는 한 발씩 발을 떼고 걷기 시작했다. 가족들은 그 모습에 모두 환호했고, 10년이 훌쩍 넘은 지금에도 그날 그 첫걸음은 내게 소중한 기억으로 남았다. 나는 그 어린 걸음에서 인류가 직립보행을 시작하며 겪은 성장과 변화, 인간이 걸어온 길에 대한 농축된 서사를 읽었다. 인간의 걸음걸이를 탐색하는 건 인류학에서는 중요한 연구과제이다. 인류의 조상이 지금의 인류처럼 걸었는지에 대한 논제는 여전히 의미 있게 다뤄지고 있다.인류학을 연구하는 과학자 못지않게 ‘걷기’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갖는 또 한 부류가 있다. 춤추는 사람들, 특히 탱고(tango)를 추는 사람들이다. 우리나라에서는 ‘탱고’라고 부르지만, 아르헨티나 현지에서는 ‘땅고’라고 부른다.아르헨티나 탱고를 배우러 간 첫날, 강사는 우리에게 한번 걸어보라고 요청했다. 걸음이 탱고에서 얼마나 중요한지 잘 몰랐던 그때, 나는 나름대로 내가 아름답고 생각하는 그런 걸음을 걸었다. 내가 생각하는 아름다운 걸음걸이란 발레에서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그것이었다. 고관절을 열어 턴아웃을 하고, 발끝은 푸앵트(포인트) 상태로, 무릎을 쫙 펴서 뻗고, 상체는 갈비뼈를 닫고 하늘로 향해 풀업하고, 어깨는 내리고 목은 길게, 코에 눈이 있다고 생각하며 걷는 그런 걸음. 17세기 프랑스 왕궁에서부터 19세기 러시아 고전발레 시대를 거쳐 완성된 그런 걸음.실제로 파리오페라발레단에는 오로지 무용수들이 걷는 것만으로 이뤄진 작품이 있기도 하다. <데필레 뒤 발레(Défilé du ballet)>, 발레의 행진, 혹은 퍼레이드라고

    2025.02.14 11:54
  • 밸런타인데이와 발레의 공통점 '퐁뒤'

    "For this was on Saint Valentine’s day  When every bird comes there to choose his mate 성 밸런타인데이 날이었다그날 모든 새가 거기로 와 자기 짝을 찾는다네" - 제프리 초서(Geoffrey Chaucer, 1343~1400)의 시 <새들의 의회(Parlement of Foules)> 中중세 시대를 비추는 거울로 불리며 중세 영어의 정착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설화집 <캔터베리 이야기>를 쓴 제프리 초서. 그가 1382년경에 완성한 시 <새들의 의회>는 오늘날 우리가 2월 14일을 사랑을 속삭이는 날로 기억하게 만든 신호탄이었다. 700행으로 이뤄진 이 시에서는 모든 새들이 각각 자신의 짝을 찾으려고 신전 앞에 모여 토론을 벌이는 내용을 담고 있는데, 바로 그날이 2월 14일 성 밸런타인 축일이었기 때문이다.초서의 이 시가 나온 이후 밸런타인데이는 문학작품에서 종종 사랑의 날, 연애의 날로 언급됐다. 1840년대에 영국의 한 초콜릿 회사가 밸런타인데이 선물용 초콜릿을 출시하면서 이날 초콜릿을 주고 받는 풍습이 생겼다. 여성이 먼저 사랑을 고백하면서 초콜릿을 주는 문화는 1950년대 이후 일본의 제과업계들이 여성해방운동을 마케팅으로 활용하면서 정착됐다. 이래저래 2월은 달콤한 달이다. 어떤 면에서는 2월이야말로 진정한 한 해를 시작하는 달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동안의 ‘썸’을 이 초콜릿으로 끝내고 공식적인 연인으로서의 사랑을 시작하려는 달, 겨울이 물러날 기세를 보이고 봄이 오려고 움찔거리는 달,발레계에서 2월은 10대 발레무용수들의 시작점이 되는 달이다. 해마다 2월이면 전 세계 10대 무용학도들이 로잔콩쿠르(Prix de Lausanne)를 치르기 위해 스위스 로잔으로 몰려든다. 1972년에 시작된 이래 권위 있

    2025.02.07 10:21
  • 임성남부터 전민철까지...한국의 발레리노

    열세 살 소년의 얼굴은 비장했다. 태양신인 아폴론으로 분장하고 무대에 올라 자기 자신을 우주의 중심인 태양으로 바라보도록 만든 왕. 어린 왕은 말 대신 발레로 강력하게 왕권신수설을 표출한 것이다. <밤의 발레Ballet de la Nuit>(1653)에 직접 출연한 프랑스 왕, 루이 14세(1638~1715)의 일화다. 그는 사람들이 기억하는 최초의 발레리노다. 그렇다면 발레사에 우리나라 발레리노는 언제쯤 등장했을까. 우리나라 발레 역사에서 그 시작점이 된 사람이자 대부로 불리는 이는 임성남(1929~2002)이다. 그는 1962년 국립무용단 단장으로, 이후 1972년 여기서 분리되어 나온 국립발레단의 초대 단장으로 30년간 무용계를 이끈 인물이다. 이 발레리노의 신화는 194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한국 1호 발레리노는 임성남1946년 3월, 우리나라에서는 한국 발레 역사의 첫출발이라고 할 공연이 국제극장 무대에 올라갔다. 신춘 무용 발표회였다. 이 공연이 중요한 건 공연을 주도한 인물 3명이 한국 발레의 1세대를 이뤘기 때문이다. 주축이 된 인물은 한동인(1922~?), 정지수(?~?), 진수방(1921~1995). 이들을 주축으로 그해 10월에 우리나라 최초의 전문 발레단

    2025.01.31 07:01
  • 발레에서 노랑은 죽음을 뜻하지, 중요한 건 파랑인데…

    레퀴엠이 울리는 겨울이다. 연이어 들리는 뉴스들에 때로는 새하얀 밤을 지새우고, 때로는 검은 그림자에 짓눌린다. 국가애도기간으로 한 해를 매듭짓고 한 해를 시작한다. 심리학에서 애도는 슬픔에 충분히 들어가 앉아 있다가 잘 이별하고, 잘 보내주고, 다시 잘 일어서는 것을 뜻한다. 슬픔과 고통의 상황에 놓일 때 예술은 무엇을 할 수 있고, 어떤 걸 해야 하는지 생각하게 되고, 예술이 깊은 애도의 통로가 될 수 있기를 바라게 된다. 어수선한 시국 앞에서는 말이 많아졌지만, 생각지 못한 죽음과 이별 앞에서는 말은 채 형체를 갖추지 못하고 길을 잃었다. 형체가 없는 말은 존재할 수 있는가. 이 질문 끝에 마크 로스코(Mark Rothko, 1903~1970)의 그림들을 떠올렸다. 형체가 아니라 색으로 수많은 서사와 감정을 담아냈던 그 그림들처럼 위로는 말의 형체를 지니지 않아도 가능하지 않을까 싶었다.발레에서 죽음은 노란색이다. 장 콕토(Jean Cocteau, 1889~1963)의 대본에 롤랑 프티(Roland Petit, 1924~2011)가 안무한 작품 '젊은이와 죽음(Le Jeune Homme et la Mort, 1946)'때문에 이런 인식이 생겼다. 이 작품은 피와 생명을 연상시키는 빨간 천 위에서 청바지를 입은 한 젊은 남성이 누워 있다가 춤을 추면서 시작된다.사랑을 잃어버린 젊은이는 상실과 고통의 몸부림을 치고, 그에게 죽음을 상징하는 여성이 노란색 원피스를 입고 방문한다. 여인은 잃어버린 사랑, 잡지 못하는 사랑에 대한 표상이기도 하며 동시에 그것을 잡고자 하면 죽음으로 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나타내기도 한다. 끝내 그것을 놓지 못한 젊은이는 죽음에 유혹당하고 죽음을 선택한다.[젊은이와 죽음(Le Jeune Homme et La Mort)]나는 젊은이의 침대 위에 놓인

    2025.01.09 09:36
  • 마법의 삼각형 '파세'는 발레의 정류장, 우리 인생에도 있을까

    만추의 계절이 첫눈 소식과 함께 작별 인사를 하고 있다. 11월은 겨울로 가는 길목이자 정류장. 올해는 유달리 추웠다 더웠다, 들썩들썩했지만, 11월은 늘 곧 다가올 추위를 이길 수 있도록 우리를 채비시키는 시간이었고, 낙엽이 흰 눈에 덮이기 전에, 한 해를 보내고 새로운 해를 맞이하기 전에, 계절의 정류장이 되어준다. 정류장은 모든 사람을 불러 모으는 곳이지만, 정류장 자체를 보기 위해 사람들이 몰려드는 곳은 아니다. 하지만 그곳은 공간을 잇고, 사람을 잇고, 시간을 잇는 중요한 곳이다.발레에서도 정류장과 같은 의미를 지닌 동작이 있다. 바로 파세(passé)이다. 파세는 발레의 모든 작품과 발레를 연습하는 모든 과정에서 늘 함께하는 동작이다. 파세는 한 다리를 바로 세워 중심축을 잡고, 다른 다리의 무릎을 구부려서 발끝을 중심축이 된 다리의 무릎 위치에 가져다 놓는 동작이다. 클래식 발레에서 파세는 턴 아웃 상태로 이뤄지기 때문에 그 모습을 앞에서 보면 두 다리 사이에 삼각형의 모양이 만들어진다. 나는 이것을 ‘마법의 삼각형’이라고 부른다.발레에서는 파세를 통해서 들어 올린 다리를 앞이나 뒤, 혹은 옆으로 보낼 수 있다. 모든 동작이 파세를 거치는 건 아니지만 아라베스크(arabesque), 애티튜드(attitude) 등 발레의 기본적인 주요 포즈나 동작들은 파세를 거쳐서 만들고, 공중에서 이뤄지는 롱 드 장브 앙 레르(rond de jambe en l'air)의 경우도 파세의 상태에서 이뤄진다. 흥미롭게도 파세라는 단어는 프랑스어로 ‘지나가는’이라는 뜻이 있다. 영어로는 패스드(passed)와 마찬가지이다. 즉, 파세는 다음 단계로 가기 위한 패스포트(passport)이다. 이 마법의 삼각형을 발

    2024.12.15 18:14
  • 하얀 얼굴에 민머리 낯설지만 빠져든다…몸신들의 나를 찾는 여행

    큐피드가 심장을 향해 화살을 쐈다. 느닷없이 화살을 맞은 사람의 심장이 걷잡을 수 없이 뛰기 시작한다. 죽는 걸까. 숨을 쉴 수가 없는데. 이 와중에 심장 뛰는 이 소리가 너무 커서 앞에 서 있는 그에게 들릴까 봐 어디론가 숨고 싶다. 사랑과 연애의 감정은 큐피드가 던진 장난질인가, 호르몬의 신호전달이 일으키는 농간질인가. 이 감정은 내 몸의 어디에서 시작된 것일까. 나의 심장인가, 나의 두뇌일까.일본 도쿄 시부야에서 전철로 두 정거장, 산겐자야에 있는 세타가야 퍼블릭 시어터. ‘부토(舞踏)’를 이끄는 일본의 중심축, 다이라쿠다칸이 2년 만에 신작 ‘뇌(Brain)’를 무대에 올렸다(11월 28일~12월 1일). 이 작품은 두뇌 안에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하고, 과학적으로 확인되지 않은 미지의 영역이 있을지 모른다는 호기심에서 비롯됐다.무대 바닥에 장착된 인체 모양 거울, 뉴런과 혈류를 형상화한 무대 세트 사이로 뇌의 모습을 표현한 의상을 입은 열일곱 명의 부토 무용수가 압도적인 미장센을 자랑하며 등장한다. 모든 무용수는 공연 80분간 처음부터 끝까지 무대 위에서 함께하며 신체 각 부위가 되기도 하고, 뇌의 명령어에 순응하며 움직이기도 하다가, 어느 순간 그 명령을 전복하고 몸의 반란을 일으키며 질문한다. 뇌와 나의 관계는 무엇일까. 나는 뇌의 지배를 받는 것일까. 아니면 내가 뇌를 지배하고 있는 것일까.과학적이지만 동시에 철학적인 이 흥미로운 주제에 매몰되다가 눈에 들어온 건 무용수들의 분장이 남다르다는 점이다. 모두 얼굴을 하얗게 칠했고, 남성 무용수는 대부분 민머리 상태였다. 부토의 전형적인 특징이다. 부토에서는 왜 이런 모습으로 무대에 서는 걸까. 이

    2024.12.04 11:20
  • 한 해의 기억을 모으는 몸짓, 가을의 아상블레(assemblé)

    북유럽의 스웨덴에서 날아온 소식에 온 나라가 떠들썩했다. 독서가 일상이 아니라 과시욕과 허영심의 표출이 되고 있는 상황에 한강 작가의 노벨상 수상이라는 소식으로 출판계와 서점들은 오랜만에 북적이는 사람들을 맞이하고 있다. 그리고 나도 몇 년 전 읽었던 한강의 글들이 생각났다. 아프기를 각오하지 않고서는 선뜻 집어들 수 없었던 한강의 글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름다운 그 문장들 안에서 일종의 스탕달 신드롬을 느끼기도 했던 기억, 한강의 글에서 영감을 받아 작업했다는 미술 작품들. 여러 기억의 조각들이 한 자리에 모아지다가 그 끝에는 수상 소식을 전한 스웨덴과 북유럽의 발레사를 떠올렸다. 발레가 이탈리아와 프랑스에서 태동해서 러시아에서 고전발레의 기틀을 잡는 동안 북유럽에서도 발레에 대한 애정은 깊어갔고, 그 뿌리가 뻗어나갈 수 있게 된 데에는 한 무용수 부자(父子)가 있었다. 프랑스 출신의 무용수였던 아버지 앙투안 부르농빌(Antoine Bournonville, 1760~1843)과 아들 오귀스트 부르농빌(August Bournonville, 1805~1879)이 그들이다. 특히 아들 오귀스트 부르농빌은 발레에서 북유럽의 신화를 만들어낸 사람이다. 신화의 시작은 역시 사랑이었다. 스웨덴 스톡홀름에는 구스타프 3세(Gustav III, 1771~1792)에 의해 시작된 스웨덴왕립발레단(Royal Swedish Ballet)이 있다. 구스타프 3세의 초청으로 스웨덴왕립발레단의 감독으로 활동했던 앙투안 부르농빌은 구스타프 3세가 암살당하자 프랑스로 돌아가기로 결정한다. 그런데 고향으로 돌아가던 그 길에 잠시 들른 덴마크에서 그만 사랑에 빠지고 만다. 사랑에 빠져 결혼까지 했던 그 무용수와는 결국 헤어졌지만, 그는 남은 생애를 덴

    2024.11.08 15:16
  • 천고마비의 시간, 말처럼 뛰는 파드슈발과 마네주

    천고마비(天高馬肥). 하늘은 높고 말은 살찌는 계절, 가을이 왔다. 과거 중국에서 천고마비는 공포심과 우려를 드러내는 사자성어였다고 한다. 가을이면 말이 살찌고 수확으로 물자가 풍부해져서 흉노족이 내려와 약탈을 자행하는 일이 잦았기 때문이다. 뉘앙스는 조금 다르지만, 예나 지금이나 천고마비가 풍요로움을 비유하고 가을을 대표하는 사자성어인 건 동일하다. 풍수지리에서도 말은 성공이나 재물을 가져다주는 동물로 여겨지니 한 해 동안 키운 농작물을 수확하는 가을에 썩 잘 어울리는 동물이라 할 수 있다.발레에서도 말은 중요한 동물이다. 발레의 동작 중에는 동물의 움직임을 표현한 동작들이 몇 가지 있는데, <백조의 호수>나 <빈사의 백조>에 등장하는 백조의 움직임, 고양이의 걸음걸이를 본뜬 ‘파드샤(pas de chat)’ 동작이 대표적이다. 말의 움직임도 발레의 언어로 탄생했다. 그중 하나가 ‘파드슈발(pas de cheval)’이다.슈발은 프랑스어로 '말', 파드슈발은 ‘말의 걸음걸이’를 뜻한다. 말이 걷거나 달릴 때의 모양새를 본뜬 동작이라 이런 이름이 붙었다. 파드슈발은 한 다리로 서고 그 다리의 복숭아뼈 위치에 다른 쪽 다리의 발을 붙였다가 앞이나 옆, 혹은 뒤로 뻗는 동작으로, 말처럼 다리를 뻗기 전에 무릎을 구부렸다가 펴는 게 특징이다. 다리를 모았다가 펼 때 무릎을 구부리는 과정이 있으면 파드슈발, 그렇지 않을 경우 다른 동작이 된다.▶▶▶[이전 칼럼] '고양이 걸음' 파드샤의 앙증맞은 매혹은 벗어날 수 없어작품 안에서 파드슈발이 쓰일 때는 말의 움직임이 갖는 활기와 경쾌함을 드러낸다. <지젤>의 1막 알브레히트와 지젤의

    2024.10.15 15:22
  • 무엇이 날 움직이게 할까…춤과 존재에 대해 묻다

    “나는 무용수들이 어떻게 움직이느냐보다 무엇이 그들을 움직이게 하는가에 더 관심이 있다.”피나 바우슈(1940~2009)의 이 유명한 말은 이후 수많은 예술가의 작업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 연극 ‘P와 함께 춤을’은 이런 바우슈의 철학에 초점을 두고 그가 남긴 탄츠테아터(tanztheater)와 작업 방식, 태도가 지금 어떤 모습으로 흐르고 있는지 탐색해 나간다. 공연은 크리에이티브 VaQi 이경성 연출가가 편지 형식의 글을 띄우면서 시작된다. 그 편지는 이미 이 세상에 ‘몸으로 존재하지 않는’ 바우슈에 대한 그리움과 그의 철학에 대한 경의, 그리고 ‘P와 함께 춤을’에 대한 간략한 소개와 배경을 담고 있다. ‘몸으로 존재하지 않는’ 바우슈는 챗GPT로 생성된 피나봇으로 이 연극에 함께했고, 우리는 그가 남긴 예술에 대한 태도와 작업 방식, 그의 정신적 세계의 집합체로 탄생한 피나봇을 통해 몸이 없이 정신으로, 탐구적 결과물로서 우리 곁에 남은 그를 만날 수 있었다.연극과 춤의 결합으로 설명할 수 있는 탄츠테아터 방식은 무용의 역사에서 획기적인 전환점이 됐다. 바우슈 이전의 무용 작품이 정해진 무용의 문법, 확장된 몸의 사용법을 통해 예술적 결과물로 내놓는 것이었다면, 바우슈 이후에는 일상의 움직임, 반복적 행위, 소리 지르기 등 내면에 감춰둔 것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무대 위에 표출되고 무용으로 받아들여졌다. 이 연극은 바우슈가 이끌었던 부퍼탈 탄츠테아터에서 활동하고 있는 무용수들을 직접 만나 그들의 인터뷰와 작업 모습을 통해 바우슈 사후의 흔적을 탐색해 나간다. 직접 리허설과 공연을 참관한 ‘카네이션(Nelken)’을 중심에 두고, ‘

    2024.10.03 19:18
  • 파리 올림픽 개막식때 시청 지붕위 발레리노가 선보인 기술, 탕 리에

    화제가 됐던 2024 파리올림픽 개막식에서 발레 애호가들 사이에서 유독 기억에 남는 장면이 있다. 파리오페라발레단의 무용수 기욤 디오프(Guillaume Diop, 2000~)가 파리 시청의 지붕 위에서 홀로 춤을 추는 장면이었다. 단순히 발레 무용수이기 때문이 아니라 지난해 내한 공연 <지젤>에서 한국 관객들과 큰 기쁨과 추억을 함께 나눴기 때문이다. 그는 이 내한 공연 후 커튼콜에서 깜짝 승급 발표를 통해 파리오페라발레단 최초로 흑인 에투알(수석무용수)이 되었다.무용수가 공연을 통해 입지가 바뀐다면 운동선수는 경기를 통해서 그렇다. 사격의 김예지 선수, 탁구의 신유빈 선수, 펜싱의 오상욱 선수, 이번 올림픽에서도 수많은 선수들이 스타덤에 올랐다. 기욤 무용수도, 이 선수들도, 그들의 본질이 변한 것은 아닐 텐데 이쪽의 세계에서 저쪽의 세계로 자리가 옮겨졌다.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하루아침이지만 이 무용수와 선수들의 삶에서는 오랜 시간이 걸린 길이었을 것이다.발레의 동작 중에는 이 모습처럼 이쪽에서 저쪽으로 몸을 옮겨주고, 발과 움직임을 자연스럽게 이어주는 스텝이 있다. 탕 리에(temps lié)이다. 탕 리에는 무게중심이 되는 발로 바닥을 지그시 누르듯 내려놓고, 다른 쪽 발은 발끝을 푸앵트(포인트) 상태로 하고 다리를 쭉 펴서 몸의 앞쪽이나 뒤쪽, 혹은 옆쪽으로 내려놓고 시작한다. 이 상태에서 무게중심을 갖고 있던 다리를 플리에 해서 다른 쪽으로 옮겨가는 것이다. 즉, 무게중심과 몸의 중심축을 이쪽에서 저쪽으로 이동시키는 동작이다. 언뜻 보기에는 몸을 옮기는 단순한 동작으로 보이지만, 이때 축이 흔들리지 않고 안정적으로 무게중심을 옮겨야 하기 때문에 골반과

    2024.09.06 14:54
  • 사랑과 파격으로 첫 문을 열어젖힌 서울시발레단

    사랑 앞에 속절없다. 한국 최초의 공공 컨템퍼러리 발레단이자 국립발레단과 광주시립발레단에 이어 48년 만에 창단한 세 번째 공공 발레단. 모두의 시선이 몰릴 수밖에 없는 중압감 앞에서 그 무게를 덜기 위해 서울시발레단이 선택한 건 역시 사랑이었다.사랑이야말로 모두의 빗장을 열고 결계를 풀어낼 가장 강력한 마법이자 시대를 관통하는 묘약이 아니겠는가. 서울시발레단은 지난 23일부터 사흘간 셰익스피어의 <한 여름 밤의 꿈>을 모티브로 서울 세종문화회관을 찾은 관객에게 ‘사랑의 묘약’을 뿌렸다.묘약의 방향은 새로운 움직임에 대한 실험보다는 환상적인 연출로 향했다. ‘한여름 밤의 꿈’은 창단 공연이라는 의미와 컨템퍼러리 발레단이라는 앞으로의 행보에 대한 의지를 시선을 사로잡는 미장센으로 드러냈다. 1막의 쏟아지는 빗줄기와 거대한 백색 날개, 2막의 사랑과 심장을 상징하는 붉은 나무, 사랑에 대한 회상을 담은 긴 회랑과 계단, 우리가 사랑에 대해 품고 있는 판타지는 환상적인 연출로 어른거린다.하지만 그 안에 담긴 이야기는 실재적이다. 뜨겁게 사랑하고, 이룰 수 없는 사랑 앞에서는 절규하고, 또 이별의 상처를 안고 지난 시간을 회상하기도 한다. 원작에서 사랑의 실타래를 꼬았다가 풀었다가 불장난을 조장하는 요정 퍽은 익살스러운 캐릭터가 아니라 사람과 사랑 사이에서 고뇌하며 함께 숨 쉬는 존재로 탈바꿈했다.퍽의 이미지를 통해 사랑에 진지하게 접근하고자 한 안무가의 의도가 읽히기도 한다. 1부에서 요정 퍽의 고뇌는 2부의 붉은 색 옷을 입은 무용수, 상처(broken heart)로 이어진다. 이 둘은 각각 1부와 2부의 장면을 이끌고 연결하는 중심축이

    2024.08.25 17:43
  • 사랑과 파격으로 첫 문을 열었다…서울시발레단 '한여름 밤의 꿈'

    사랑 앞에 속절없다. 우리나라 최초의 공공 컨템퍼러리 발레단이자 국립발레단과 광주시립발레단에 이어 48년 만에 창단한 세 번째 공공 발레단. 모두의 시선이 몰릴 수밖에 없는 중압감 앞에서 그 무게를 덜기 위해 서울시발레단이 선택한 건 역시 사랑이었다.사랑이야말로 모두의 빗장을 열고 결계를 풀어낼 가장 강력한 마법이자, 시대를 관통하는 묘약이 아니겠는가. 서울시발레단은 셰익스피어의 <한 여름 밤의 꿈>을 모티브로 관객에게 ‘사랑의 묘약’을 뿌렸다.    묘약의 방향은 새로운 움직임에 대한 실험보다는 환상적인 연출로 향했다. <한여름 밤의 꿈>은 창단 공연이라는 의미와 컨템퍼러리발레단이라는 앞으로의 행보에 대한 의지를 시선을 사로잡는 미장센으로 드러냈다. 1막의 쏟아지는 빗줄기와 거대한 백색 날개, 2막의 사랑과 심장을 상징하는 붉은 나무, 사랑에 대한 회상을 담은 긴 회랑과 계단, 우리가 사랑에 대해 품고 있는 판타지는 환상적인 연출로 어른거린다.  하지만 그 안에 담긴 이야기는 실재적이다. 뜨겁게 사랑하고, 이룰 수 없는 사랑 앞에서는 절규하고, 또 이별의 상처를 안고 지난 시간을 회상하기도 한다. 원작에서 사랑의 실타래를 꼬았다가 풀었다가 불장난을 조장하는 요정 퍽(puck)은 익살스러운 캐릭터가 아니라 사람과 사랑 사이에서 고뇌하며 함께 숨 쉬는 존재로 탈바꿈되어 있다.퍽의 이미지를 통해 사랑에 대해 진지하게 접근하고자 한 안무가의 의도가 읽히기도 한다. 1부에서 요정 퍽의 고뇌는 2부의 붉은 색 옷을 입은 무용수, 상처(broken heart)로 이어진다. 이 둘은 각각 1부와 2부의 장면들을 이끌고 연결하는 중심축이 된다.&nb

    2024.08.25 12:55
  • 좋은 와인에 테루아가, 발레엔 땅의 기운 받는 '아 테르'가 있다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고/ 먼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여름은 포도가 익어가는 계절. 시인 이육사(1904∼1944)가 포도알 안에 독립투사로서의 전설과 꿈을 담은 것처럼, 사람들은 이 뜨거운 계절이 지난 후에 얻을 수확을 기다리며 각자의 열망과 꿈을 담는다. 은유가 아닌 직관적으로 포도가 알차게 영글기를 기다리는 사람들은 와이너리 관계자들일 것이다. 내리쬐는 햇볕 한 줌, 내리는 비 한 방울에 울고 웃는 건 그게 포도, 와인의 맛과 품질을 좌지우지하기 때문이다. 때를 벗어나 비가 내리면 그 해의 와인의 품질과 향미에는 치명적일 수 있다.와인의 맛을 결정하는 요소들에는 많은 것들이 있지만 그중 가장 중요하게 언급되는 게 테루아(terroir)이다. '테루아'라는 말이 프랑스어로 ‘땅’을 의미하는 테르(terre)에서 유래된 만큼 좁게는 포도가 자라는 토양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와인 관계자들은 토양의 상태와 기온이나 강수량, 일조량 등 기후, 지형은 물론, 포도나무를 둘러싼 미생물과 동식물 같은 생물들, 포도 재배 방식과 와인 양조 방식 등 와인을 만드는 활동까지 통틀어 테루아라고 부른다. 어쨌든 와인의 맛과 풍미는 간단하게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점과 테루아는 아주 중요한 근간이 된다는 점은 확실하다.특히 지금처럼 포도가 무르익는 여름에는 햇볕을 많이 받아야 한다. 프랑스의 보르도와 부르고뉴, 스페인, 이탈리아, 포르투갈 등 지중해 지역이 와인으로 유명한 건 작열하는 태양 덕분일 것이다. 와인 신생지로 각광받는 아르헨티나, 칠레도 마찬가지다. 이 지역들은 고른 기후변화를 보여주기 때

    2024.08.01 00:01
  • 하늘에서 원을 그려보는 거야, 여름의 초록 공기를 가르며

    계절은 온도계의 숫자보다 코끝에 닿는 공기로 먼저 느끼게 된다. 추운 겨울을 지나 봄이 올 때 따뜻한 기운이 바람에 실려 오듯이, 여름이 시작되는 지금, 새들과 벌레들의 노래가 공기를 타고 창가로 날아온다. 발레는 ‘공기’와 관련이 깊다. 공기의 정령이 등장하는 <라 실피드(1832)>에서는 최초의 포인트슈즈(토슈즈)가 등장하기도 했다. 중력의 지배를 받지 않는 살랑살랑 가벼운 움직임과 춤의 호흡이야말로 발레의 매력이다.발레는 하늘로 향하는 춤이기 때문에 공기를 가르며 날아다니는 동작들이 많은 것도 특징이다. 이렇게 발과 다리 혹은 몸통이 공기 중에 떠 있는 동작들을 통틀어 ‘앙 레르(en l'air)’라고 부른다. 공기(air)라는 단어에서 알 수 있듯이 ‘공기 중에, 공중에’라는 뜻을 갖고 있는 용어이다.앙 레르의 대표적인 동작은 ‘롱 드 장브 앙 레르(rond de jambe en l'air)’이다. 한쪽 다리로 지탱하고 서서, 다른 쪽 다리를 서 있는 다리와 직각이 되게 든 채 무릎을 폈다 구부렸다 하며 공중에서 타원을 그리는 동작이다. '롱드(rond)'는 라운드(round), 즉 원을 그린다는 뜻이고, ‘장브(jambe)’는 다리라는 뜻이다. 뜻 그대로 ‘공중에서 원을 그리는’ 동작인 것. 이 동작에서는 들고 있는 다리가 앙 레르 상태이다.하지만 이 동작에서 정작 중요한 지점은 공중에서 타원을 그리는 움직임이 아니라 동작을 수행할 때 허리와 골반이 한쪽으로 기울어지지 않고 가운데 중심점을 잡고 있는 것이다. 즉, 아무리 다리를 들어도 허리선과 골반 높이는 수평을 유지하고 있어야 한다. 발레의 여러 동작들은 높이 뛰고, 높이 들

    2024.07.01 11:15
  • 피렌체와 발레 사이에 꽃이 있다, 낭만적 결말은 아니더라도

    “준세이, 약속해 줄래? 나의 서른 살 생일은 피렌체 두오모에서.” “그래, 약속해.”- 영화 <냉정과 열정 사이> 중에서일본의 작가 에쿠니 가오리(江國香織)와 츠지 히토나리(辻仁成)가 함께 집필해서 1999년에 출간한 소설 <냉정과 열정 사이>는 영화로도 제작돼서 많은 사랑을 받았다. 지난해에 영화 개봉 20주년을 맞이해서 재개봉되기도 했고, 올해는 24주년 특별판 책이 출간되기도 할 정도로 이 로맨스는 잊히지 않는 이야기가 되고 있다. “어느 때 문득, 그러고 보니 그런 일이 있었지, 하고 떠올리기도 하지만 그걸 또 머릿속에 새겨 두지 않으니, 기억이란 덧없는 아지랑이의 날개처럼 햇살 아래 녹아내려 영원히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책 속에서 주인공 준세이가 독백하던 것과는 달리.사랑했지만 헤어진 두 사람, 준세이와 아오이. 언젠가 두 사람은 약속했다. 아오이의 서른 살 생일에 피렌체 두오모 성당에서 만나자고. 그 둘이 만나기로 했던 이탈리아 피렌체 대성당의 정식 명칭은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 Cattedrale di Santa Maria del Fiore), ‘꽃의 성모 마리아’라는 뜻을 갖고 있다.피렌체라는 이름의 어원에도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그중 하나가 ‘꽃’이라는 의견이 있다. 피렌체는 14~15세기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꽃을 피운 곳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발레의 꽃씨를 뿌린 도시이기도 하다. 이 도시에서 막강한 힘을 발휘하던 메디치 가문과 프랑스 왕가의 혼담이 이뤄진 게 발레의 시작점이 됐기 때문이다. 1533년, 메디치 가문의 카테리나 데 메디치(Catherine de Médicis, 1519~1589)가 프랑스의 왕 앙리 2세(Henri II, 1519~1559)와 결혼을 하면서 가져

    2024.05.31 1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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