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알렉산더 에크만 <해머(Hammer)>
& 예테보리 오페라 댄스컴퍼니
14~16일, LG 아트센터 SIGNATURE 홀
정신을 잃던가, 정신을 차리던가. 해머(망치)로 머리를 맞으면 이 둘 중 하나가 일어난다. 해머는 이렇게 이중적인 속성을 갖고 있다. 알렉산더 에크만은 굳어진 우리의 자아를 부수고 서로를 다시 연결하자는 의미를 이 작품 <해머>에 담았다고 밝힌 바 있다. 결국 해머는 파괴를 함으로써 새로운 것을 창조하고, 끊어냄으로써 다시 잇는 힘과 의식을 상징하고 있다. 그래서 해머는 성물(聖物)이다. 마치 십자가를 걸듯 조심스럽고 소중하게 해머를 무대 한편에 거는 모습으로 이 공연이 시작되는 것도 그 때문이고, 2막에서 타인과의 연결이 끊어지고 모든 관계가 무너졌을 때 조용히 해머를 거둬가는 장면이 들어간 것도 그 때문이다. 우리의 해머는 지금 어디에 걸려 있는가.
<해머> 2막 / 사진 제공. LG아트센터개성과 자유가 공존하던 시대, 관객까지 전염시킨 공동체 감성
이번 작품의 제목과 의미는 알렉산더 에크만의 안무작들이 갖는 특징과도 연결되어 있다. 스웨덴 출신의 안무가 알렉산더 에크만은 21세라는 젊은 나이에 스웨덴의 쿨베리 발레단에서 안무가로 데뷔한 이래로 파격적인 연출과 비주얼 쇼크의 작품을 선보이면서 주목받아 왔다. 무대 위에 물 5천 리터를 부어서 진짜 호수를 만든 <백조의 호수>와 4만 개의 공을 쏟아내며 춤과 놀이를 결합한 <플레이>는 환상적인 미장센으로 유명한 작품이다. 하지만 시각적 연출만 화려했다면 알렉산더 에크만이 지금처럼 명성을 얻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의 작품에는 ‘위트 안에 담긴 통렬함’이 있다. ‘무용은 웃을 수 있어야 한다’는 작품 철학을 가지고 있는 그는 사람들을 즐겁게 만들지만 결코 그 웃음이 가벼운 것으로 지나가게 내버려두지 않는다.
이번 작품 <해머>에서도 ‘에크만식 통렬함’을 확인할 수 있다. 해머가 걸리고 작품이 시작되면 무용수들은 누드톤의 미니멀한 의상을 입고 나와 군무를 펼친다. 이 장면은 인류의 역사가 시작되는 때로 볼 수 있다. 그때 그곳에 쌓아놓은 벽돌을 무너뜨리며 화려한 색채를 입은 여성이 등장한다. 이제 이 무채색의 세상에 나타난 무용수들은 저마다의 색과 움직임으로 자신의 개성과 자유로움을 드러내며 춤을 춘다. 하지만 자기 자신만 내세우는 게 아니라 모두 함께 어우러지는 공동체의 감성을 드러낸다. 경계를 세운 벽돌들은 모두 무너졌고, 그들 안에는 웃음과 서로를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이 있다. 알렉산더 에크만은 이 장면을 히피들이 갖는 공동체적 성격을 모티브로 만들었다고 이야기했다.
<해머> 1막 / 사진 제공. LG아트센터
그 공동체 감성은 급기야 객석까지 점유한다. 1막 마지막 장면에서 무용수들은 무대 위에서 내려와 객석의 의자 위로 이동하기 시작한다. 무대와 객석을 나누는 프로시니엄 극장의 한계를 무너뜨리는 시도는 최근에 부쩍 늘어나긴 했지만, 객석의 통로가 아니라 관객들이 앉아 있는 의자 위로 올라가는 경우는 흔치 않다. 관객들 사이에 깊게 개입해서 들어가는 그 시도는 관객들을 무대의 방관자가 아니라 작품을 완성하는 적극적인 참여자로 둔갑시킨다. 관객도 이 공동체의 일원이 되어 무용수들과 함께 사진도 찍고 유례없는 유쾌한 상황이 연출된다. 이 장면은 2막에서 보여줄 통렬함과 이어진다. ‘함께 찍는’ 것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나 자신만을 찍기’ 시작하면서 우리는 이웃을 잃고 관계를 잃고 나 자신을 잃기 때문이다.
<해머> 1막 / 사진 제공. LG아트센터현대판 나르시스를 향한 해머의 일침
미국의 소설가이자 예술 평론가인 수전 손택(Susan Sontag, 1933~2004)은 저서 『사진에 관하여』에서 이렇게 말했다. “사진을 찍는 일은 대상을 전유하는 일이다. 이 전유는 그러나 실제로는 가짜 전유이며 세계에 대한 ‘진술’이라 보기 어렵고, 또 세계를 진정으로, 심층적으로 ‘이해’하는 일과도 거리가 멀다.”
<해머>의 2막에서 우리는 웃음을, 색을, 자유를, 개성을, 그리고 공동체의 감성을 잃어버린다. 성형으로 과하게 자신의 몸을 부풀리고 해체시킨 사람들은 연신 카메라로 자신을 찍어댄다. 하지만 ‘사진을 찍으며 자신을 전유하는’ 그 행위는 수전 손택의 말처럼 ‘가짜 전유’이자 세계에 대한 이해와는 긴 거리를 갖는다. 1막에서는 가깝게 밀착되어 있는 두 사람의 얼굴이 무대 바닥을 장식했지만 2막이 시작되면서 그 모습은 뜯어지고 매끄러운 바닥이 번쩍인다. 우리의 모습을 비추는 그 바닥은 마치 나르시스가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보는 연못과 같다. 타인과의 밀접한 관계성은 사라지고 자기애만 남은 현실의 은유가 무대 바닥을 통해 드러난다. 일렬로 무대 앞을 보고 선 무용수들이 상대방을 견제하고 자기가 돋보이려고 자꾸 앞으로 나오는 장면도 이 점을 직접적으로 이야기한다. 나만 중요하고 나만 돋보이고 싶다는 의지가 그 장면에서 표출된다. 절정은 토크쇼 장면이다. 과잉된 자기표현이 드러나는 이 장면은 ‘위트 안에 담긴 통렬함’의 극치를 보여준다.
<해머> 2막 / 사진 제공. LG아트센터
개인주의가 엄습한 그곳에 ‘해머의 파괴’가 일어난다. 2막 후반부에 한 사람이 벽돌을 계속 옮기며 길을 만들어주고 다른 사람이 그 위를 걸어가는 장면은 의미심장하다. 이 2인무는 타인과 나, 혹은 가짜 자아와 진짜 자아의 춤으로도 볼 수 있다. 이어서 높게 쌓아 올린 벽돌을 어떻게든 무너뜨리지 않으려고 애쓰는 모습으로,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국 모두 다 무너져버리는 장면으로 이어진다.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린 그곳에서 사람들은 진짜 웃음을 찾는다. 시선은 다시 타인에게로 향하고 서로에게 향한다. 이 장면에는 알렉산더 에크만이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함축되어 있다. 다 깨지고 무너진 그 폐허 속에서 우리는 진정한 자신을 발견하고 새로운 세상을 꿈꿀 수 있다는 점에서 해머가 주는 희망과 상징을 읽을 수 있다.
<해머> 2막 / 사진 제공. LG아트센터
<해머> 2막 / 사진 제공. LG아트센터
작품에서 시대가 변하는 순간마다 한 여인이 상징적으로 등장해서 바닥에 엎드려 다리 한쪽을 까딱거리다가 사라진다. 1막의 첫 시작점에는 누드톤의 의상을 입은 여인이 등장했고, 이후 화려한 색의 의상을 입은 여인이 등장했다. 2막에서는 검정 의상에 선글라스를 끼고 등장하고, 마지막에는 고양이의 탈을 쓴 여인이 등장해 같은 포즈를 취하며 막이 내린다. 이 마지막 장면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알렉산더 에크만은 그 해석을 관객에게 넘겼다.
여러 해석이 가능하지만, 현재 화두가 되고 있는 담론을 볼 때 인간 중심의 사고에서 벗어나야 하며 인간과 동물의 관계 회복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수 있다. 2막이 시작되고 동물의 소리들이 여기저기 들려오는 것도 예민하게 포착된다. 영국의 비평가이자 소설가인 존 버거(John Berger, 1926~2017)는 저서 『다른 방식으로 보기』에서 동물과 인간의 관계가 끊어진 점을 꼬집은 바 있다. 공동체의 회복에서 ‘타인’의 범주는 인간을 넘어서서 동물까지 확대되어야 한다는 의견을 마지막 장면에서 읽을 수 있다.
<해머> 2막 / 사진 제공. LG아트센터
2022년 예테보리 오페라 댄스컴퍼니와 손잡고 초연한 이 작품은 현재 이 컴퍼니의 인기 레퍼토리로 자리 잡았다. 웃다가 우리를 돌아보게 되는 해머의 통렬함은 우리나라에서도 통했다. 우리에게는 아직 해머가 있다. 새로운 시작은 때로는 과감한 파괴를 담보로 한다. <해머>는 웃음과 춤, 용기와 희망으로 포장된 통찰적 메시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