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손을 잡았다. 심장이 뛰었다. 손과 심장이 하나로 연결된 것 같았다. 사랑에 빠져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런 경험이 있지 않을까. 한용운의 시구를 빌어서 이야기하자면, 손을 잡는 건 "운명의 지침을 돌려놓는 날카로운 추억"이다. 손을 잡는 행위를 통해 친구는 연인이 되고, 적은 동지가 된다. 이 지점에서 스위스 작가이자 철학자인 드니 드 루즈몽(Denis de Rougemon, 1906~1985)의 저서 『손으로 생각하다(penser avec les mains)』가 떠올랐다. 책의 내용은 우리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을 담고 있지만 제목의 상징성이 매력적이라 종종 이 제목이 차용되는 걸 발견한다. 특히 예술에서 그렇다. 예술가에게 있어서 ‘손으로 생각하는’ 경우는 빈번하게 일어난다. 탱고를 추는 사람에게도 그렇다. 탱고에서는 마주 잡은 손과 가슴을 통해 상대방의 의도를 읽고, 신호를 주고받으며 두 사람만의 춤을 만들어 나간다. 탱고에서 손은 또 하나의 심장이다.
탱고에서 손은 신호를 주고 받는 또 하나의 심장이다. / 사진. ⓒ WHITE CROWN DESIGN, Deborah Christensen
탱고에서 손은 신호를 주고 받는 또 하나의 심장이다. / 사진. ⓒ WHITE CROWN DESIGN, Deborah Christensen
그런데 이렇게 낭만적으로 들리지만, 처음 탱고를 배울 때는 낭만이 아니라 남사스러운(?) 현실에 마주친다. 아르헨티나 탱고를 추기 위해서 두 사람이 함께 취하는 기본자세는 '아브라소(abrazo)'이다. 스페인어로 ‘포옹’을 뜻하는 말로, 한 손은 마주 잡고 다른 손으로는 서로의 등을 안는 자세를 가리킨다. 특히 가슴을 밀착하는 포옹의 자세는 ‘아브라소 세라도(abrazo cerrado)’라고 한다. 언젠가 꼭 한번 아르헨티나 탱고를 배워보겠다는 결심과 호기심은 이 아브라소 때문에 번번이 그 문턱을 넘지 못했다. 외간 남자를 꼭 껴안고 춤을 춰야 한다니, 이렇게 해괴망측할 수가!

탱고와의 인연은 꽤 오래되었는데도 이제야 탱고를 배우게 된 것도 다 그 때문이다. 심지어 탱고와의 첫 인연은 우리나라에 탱고가 들어오기 시작했던 2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몸담고 있던 방송국에서 탱고에 관한 미니 다큐를 맡아 인터뷰와 촬영을 진행했고, 이후에도 신기할 정도로 이러저러한 이유로 탱고와 마주칠 일들이 생겼다. 그럴 때마다 탱고를 배워보라고 권유받았지만 그때마다 늘 손사래를 쳤다. 세라도를 한다는 게 생각만해도 민망했던 것이다. 지금 돌아보면 그런 상황에서도 아브라소 때문에 탱고를 안 하겠다고 버틴 것도, 결국에는 이렇게 탱고에 입문하게 된 것도 다 재밌는 일화가 되었다. 춤 자체에 대한 호기심이 아니었다면 여전히 탱고는 내게 '보는 춤'으로만 남았을 것이다. 이 문제는 나만의 문제가 아니었다는 걸, 함께 탱고를 배우는 사람들에게서, 주변 사람들에게서 알게 됐다. 아닌 게 아니라 탱고를 권하면 십중팔구는 외간 남녀를 껴안는 게 꺼려진다며 예전의 나와 똑같이 손사래를 쳤다.

아브라소에 대해 편해진 계기는 어느 외국인 탱고 강사와 이야기를 나누면서이다. 아르헨티나에서는 가족이나 친구들, 지인들과 껴안는 게 자연스러워서 탱고의 아브라소를 어색해하지 않지만, 한국에서는 문화적 차이 때문에 누군가를 껴안고 추는 걸 힘들어한다는 것이다. 그는 한국에서 별도로 아브라소 수업 시간이 있다는 사실에 흥미로워했다. 듣고 보니 껴안는 것을 배우기 위해 수업을 따로 들어야 한다는 게 재밌는 일이긴 하다. 이 대화를 나누고 나서 나는 아브라소에 대한 시각이 바뀌었다. 그날 2시간의 탱고 수업보다 이 잠깐의 대화가 탱고에 조금 더 다가가고, 아브라소에 대해 마음을 열게 만들었다.
아브라소는 탱고의 시작점이자 정체성. / 사진. ⓒ Preillumination Seth
아브라소는 탱고의 시작점이자 정체성. / 사진. ⓒ Preillumination Seth
돌아보니 발레에서도 비슷한 풍경이 있다. 남성들이 타이츠를 입는 문화에 대해서 그렇다. 추는 사람도, 보는 사람도 처음에는 이 부분에 낯설어하고 어색해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발레에서 말하는 ‘아름다운 몸’에 대해 귀 기울이게 되고, 타이츠를 입은 남성 무용수에게서 살아 움직이는 조각상의 모습을 발견한다. 그리고 발레를 처음 배우러 가는 남성에게 무턱대고 타이츠를 입으라고 강요하지 않는 것처럼, 탱고 역시 처음부터 상대방과 가슴을 붙이고 껴안으라고 하지는 않는다. 처음에는 서로 어느 정도 떨어져서 팔과 손만 잡고 추는 ‘오픈 홀딩’으로 배우게 되니 탱고는 배우고 싶은데 아브라소 세라도 때문에 망설이는 사람들에게 안심하라고 말하고 싶다.

상대방을 꼭 껴안고 추는, 이 남사스러운(?) 기본자세를 탱고에서 선호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역사적으로는 이렇다. 탱고는 고단한 하루로 지친 사람들이 유흥가의 여성들과 껴안고 춤을 추는 데서 시작된 춤이다. 즉, 관객을 대상으로 보여주기 위한 춤, 기술과 동작을 연마하는 춤이 아니라, 상대방과 나 사이의 교감에 방점을 둔, 위로하고 위로받는 춤으로 시작됐다. 그렇기 때문에 상대방을 껴안는 아브라소는 중요할 수밖에 없다.

기능적으로도 아브라소는 중요하다. 가슴과 가슴, 심장과 심장을 걸쇠를 거는 것처럼 결착시키고, 그 심장과 잡은 손으로 춤을 추는 내내 어떤 신호와 대화를 주고 받아서 상대방의 의도를 읽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춤을 추는 두 사람은 각자 자신의 무게중심, 즉 몸의 축을 갖고 있고 그것을 사용할 수 있어야 하는데 이때도 아브라소는 유용하다. 탱고에서는 두 사람이 심장을 붙이고 껴안으면서 두 사람이 공유하는 또 하나의 축이 생긴다. 탱고를 일컫는 ‘하나의 심장, 네 개의 다리’라는 유명한 표현은 이런 점 때문에 나온 말이란 걸 탱고를 배우면서 깨닫게 되었다. 둘 사이에 생긴 이 ‘공유의 축’은 조화롭고 균형있는 춤을 만들고, 탱고의 걷기를 완성하며, 공연을 위한 다양한 동작과 기술이 접목됐을 때도 두 사람을 지켜주는 든든한 지지대가 된다.
하나의 축, 하나의 심장, 그리고 음악. / ⓒ Pin di Jasmeen Sada su Tango Argentino
하나의 축, 하나의 심장, 그리고 음악. / ⓒ Pin di Jasmeen Sada su Tango Argentino
이 지점에서 탱고의 성격을 말해주는 부분이 떠오른다. 이 축과 껴안는 자세 안에서 교감이라는 내밀한 대화가 이뤄진다는 점이다. 누군가를 안아준다는 건 안아준다는 행위는 인간이 인간에게 할 수 있는 가장 공감 어리고 따뜻한 행위가 아닐까 싶다. 탱고는 손으로, 심장으로 상대방을 안는다. 아브라소가 민망한 자세가 아니라 가장 따뜻한 자세인 걸 느꼈을 때 비로소 나는 세라도를 할 수 있었다. 탱고는 누군가를 안아주는 춤이기 때문에, 그것이 이 춤의 정체성이기 때문에, 그래서 아름답다.

요즘은 탱고의 아브라소가 콘스탄틴 브랑쿠시(Constantin Brâncuși, 1876~1957)의 연작 조각 작품 <입맞춤>을 닮았다는 생각도 든다. 이 작품을 볼 때마다 딱딱하고 무겁고 차가운 돌덩어리가 얼마나 따뜻하고 사랑스러워질 수 있는지 깨닫곤 한다. 감정은 재료를 넘어서고 그 성질을 변화시킨다. 아브라소도 그럴 것이다. 나의 아브라소도 그렇게 될 것이다. 기능과 교감 사이에서 접점을 찾고, 상대방과 힘을 주고받는 데서 균형을 찾다가 언젠가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따뜻하고 아름다운 껴안기’를 만나게 될 것이다. 그게 탱고이고, 그게 삶이니까.
콘스탄틴 브랑쿠시 <입맞춤> 연작의 첫 번째 작품, 1907년. / ⓒ Adagp, paris 2024/The Art Museum of Craiova, Roumanie
콘스탄틴 브랑쿠시 <입맞춤> 연작의 첫 번째 작품, 1907년. / ⓒ Adagp, paris 2024/The Art Museum of Craiova, Roumanie
이단비 작가·<발레, 무도에의 권유>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