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추천 뉴스
박세은이 이끈 파리오페라발레 에투알 갈라, 우아함의 정석을 보여주다
[리뷰] 파리오페라발레 에투알 갈라 2025
17세기에 새겨진 우아한 기품의 DNA
21세기 파리오페라발레에 대한 기대로
17세기에 새겨진 우아한 기품의 DNA
21세기 파리오페라발레에 대한 기대로
루이 14세 시절, 정치적 이유이든 놀이의 이유이든 발레는 중요한 문화였다. 그때 프랑스 귀족들이 추던 그 춤, 그 발레는 ‘프렌치 노블 스타일’이라고도 불렸다. 발레에 진심이었던 귀족의 문화에서 전문무용수들의 영역으로 발레의 입지가 변화된 건 루이 14세가 세운 아카데미 때문이었다. 그 아카데미가 지금의 파리오페라발레단이다. 이번 내한공연을 준비한 파리오페라발레단 무용수들은 ‘프랑스식 접근을 보여주는 공연’, ‘프랑스 무용의 풍경’을 전할 거라는 의지를 보였다. 프랑스식 춤의 특징이란 결국 뿌리를 찾고 찾아 올라가 보면 프렌치 노블에서 중시했던 우아한 자태일 것이다. 그것이 우리가 다른 유수 해외발레단과 달리 파리오페라발레에서 가장 기대하게 되는 지점이다.
파리오페라발레를 읽는 세 가지 키워드
아메리칸발레시어터, 영국 로열발레에 이어서 프랑스 파리오페라발레의 내한으로 어느 때보다 뜨거운 한 해를 보내고 있다. 자연스럽게 각 발레단의 특성과 레퍼토리를 나란히 놓고 바라보며, 그 차이점을 발견하고 음미하게 되는데 이번 파리오페라발레단 내한공연은 세 가지 지점에서 특성과 차별점을 읽어본다.
첫째, 프렌치 노블의 전통은 파리오페라발레 무용수들의 몸을 통과하며 2025년 현재 어떤 자태의 춤으로 흘러나올까. 둘째, 갈라 공연들은 보통 레퍼토리보다는 무용수의 기량과 스타성에 의존하게 되는 경우가 많은데 이번에 중편 레퍼토리들을 많이 선보이는 만큼 안무가와 작품의 힘으로 관객의 관심을 끌어낼 수 있을까. 셋째, 말러, 쇼팽, 라흐마니노프, 쇼스타코비치, 라벨 등 개성 다른 음악가들의 음악은 어떻게 춤으로 발현됐고, 춤과 음악의 조우를 어떤 구성과 연출로 드러냈을까.
<호두까기인형>는 우리나라에서는 주로 러시아 발레를 올리기 때문에 이번처럼 루돌프 누레예프가 안무한 프랑스식 <호두까기인형>을 보는 건 흔한 일이 아니다. 두 무용수는 가벼운 발놀림을 중시하고 방향의 변화가 많은 안무를 소화하면서 ‘블링블링한’ 판타지를 만들어냈다. 또 한 명의 주목한 에투알은 마티외 가니오이다. 그는 21세기가 시작된 2004년에 에투알로 승급해서 20년 넘게 에투알로 춤을 췄기 때문에 21세기 파리오페라발레의 상징처럼 여겨진 무용수이다. 지난해에 현역에서 은퇴했고, 이번 공연이 첫 내한이라 이목이 쏠렸다. 첫날 공연에서 우베 숄츠 안무작 <소나타>로 무대에 오른 그는 레오노르 볼락과 함께 낭만적 파드되의 정석을 보여주었다.
레퍼토리 면에서는 흥미로운 부분들이 많았다. 한국에서 쉽게 볼 수 없는 레퍼토리들을 대거 선보였다는 점에서, 갈라용 하이라이트가 아니라 완성된 중편 작품들을 그대로 선보였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다. 첫 무대였던 모리스 베자르 안무작 <방랑하는 젊은이의 노래>도 그런 작품 중 하나이다. 24살의 청년 말러가 고뇌하던 사랑에 대한 고백을 담은 음악을 사용한 점이 눈에 띈다. 말러가 남긴 9개의 교향곡은 이 연가곡이 시작점이 됐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말러의 색이 담긴 이 곡은 2명의 무용수의 몸을 통해 번뇌와 젊은 날의 방황을 그려내고 있다. 이번 무대에서 마르크 모로와 제르망 루베는 이 음악의 심취한 서정적 선을 몸으로 드러냈고, 두 사람이 입고 있는 푸른 옷과 붉은 옷은 이상과 현실, 이성과 지성, 슈퍼에고와 이드를 상징할 수 있겠다는 점을 보여줬다. 관객들은 자신의 상황에 따라 그 어떤 것을 대입해서 바라보며, 그 둘 사이에서 자아를 꺼낼 수 있는 작품이었다.
공연 전부터 박세은 무용수가 애정을 드러낸 제롬 로빈스의 <인 더 나이트>는 특히 관객들의 호응이 높았다. 지난 2022년 에투알 갈라에서도 선보였던 이 작품을 또 한 번 들고 내한한 것도 쇼팽의 음악에 맞춰 세 커플이 보여주는 사랑의 모습이 내적 서사를 드러내며 섬세한 프랑스식 발레의 매력을 한껏 보여주기 때문이다. 로빈스는 뮤지컬에서도 두각을 나타낸 안무가였는데 말년에는 발레에 집중하며 스토리를 배제한 내밀하고 추상적인 작품들을 통해 ‘상품’이 아닌 순수한 ‘작품’을 만들며 살고 싶어 했다. 그는 발레에서 조지 발란신의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인 더 나이트>는 조지 발란신이 썩 좋아하지 않은 작품이었지만 오늘날 파리오페라발레의 주요 레퍼토리이자 관객들이 사랑하는 작품으로 남은 게 흥미로운 지점이다. 이번 공연에서 조지 발란신의 신고전주의발레 <소나티네>도 올랐기 때문에 영향을 주고받은 두 예술가의 작품을 나란히 놓고 감상할 수 있는 시간이 되기도 했다.
파리오페라발레 대한 아쉬움과 기대를 실으며
이번 공연은 고전발레 레퍼토리도 프랑스 안무 버전의 작품을 선택함으로써 프랑스의 춤을 보여주겠다는 의지를 확고히 드러냈고, 전반적으로 무용수들의 기량과 호흡에 있어서 왈가왈부할 필요는 없는 무대였다. 다만, 17세기부터 그 춤에 흐르고 있을 우아한 자태가 얼마나 잘 드러나고, ‘프랑스다운’ 춤을 보여줬는가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릴 수 있다. 물리적인 음악의 길이에 몸을 맞추기보다 호흡과 느낌을 더 채워서 길고 깊게 몸과 춤을 사용하는 파리오페라발레만의 감성을 충분히 느낄 수 있는 무대였으면 만족도는 더 높아졌겠다는 아쉬움은 있다.
그리고 흥미로운 레퍼토리는 많았지만, 공연의 구성과 배치에 있어서 이 무대를 관통하고 통찰하는 하나의 주제를 갖고 구성이 되지 않은 점도 아쉬운 부분으로 남았다. 이것은 대부분의 갈라 공연들이 풀어야 할 숙제이기도 하다. 이제 단편적인 조각으로 갈라를 즐기는 시대를 지나 통합적인 하나의 공연으로 가치를 지닌 갈라 공연이 필요한 시대이다. 그런 면에서 연주자와 무용수의 등·퇴장도 막을 내리고 올리는 형태가 아니라 내러티브가 이어지는 구성과 연출이 필요하며, 그런 부분이 안무작과 음악의 흐름을 잘 드러내는 형식으로 드러내는 것이 좋겠다. 파리오페라발레의 역사와 기량이라면 충분히 가능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이단비 작가 • <발레, 무도에의 권유>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