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 정상들이 미래지향적인 관계를 구축하기 위해 배수진을 쳤다.”

일본 최대 일간지 요미우리신문은 8일 윤석열 대통령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의 정상회담을 이렇게 평가했다. 이 신문의 평가대로 전날 공동 기자회견에서 양국 정상은 자국 내 정치 역학 관계를 잠시 잊기로 한 듯 적극적으로 소신을 펼쳤다.

윤 대통령은 “과거사가 완전히 정리되지 않았다고 해서 현안과 미래관계에 대해 한 걸음도 내디뎌선 안 된다는 인식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말했다.

일본 정계에서는 윤 대통령도 현재 30% 안팎인 지지율이 더 떨어지면 역대 한국 대통령이 그랬던 것처럼 ‘반일(反日)’을 국면 전환 카드로 쓸 것이라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이 같은 우려를 반영한 일본 기자의 질문에 윤 대통령은 “정부의 방침은 바뀌지 않는다”고 일축했다.

기시다 총리는 강제징용 피해자와 관련해 “많은 분이 매우 힘들고 슬픈 일을 겪으신 데 대해 마음 아프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사전에 조율되지 않은 발언이었다. 일본 측에서는 즉각 “한국 측을 배려한 발언이 자민당 보수파 의원의 반발을 불러일으킬 것”이라는 반응이 나왔다. 극우 성향의 산케이신문도 “아슬아슬한 표현”이라고 평가했다.

윤 대통령은 기시다 총리의 취약한 당내 기반을 고려해 “너무 부담 갖지 말고 오시길 바란다”는 뜻을 사전에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기시다 총리는 한국 국민에게 자신의 진정성을 전달하려는 듯한 발언을 이어 나갔다. 한국의 강제 징용 해법에 대해 “과거의 쓰라린 기억을 잊지 않으면서도 미래를 위해 마음을 열어준 것에 감동했다”고 했다. 원전 오염수 문제와 관련해선 “한국 국민의 건강과 해양 환경에 나쁜 영향을 주는 형식의 방류는 인정하지 않을 것”이라고도 했다. 히로시마에서 열리는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에서 한국인 원폭 피해자 위령비를 함께 참배하자는 제안도 기시다 총리가 먼저 했다.

기시다 총리도 올초까지 30% 안팎까지 떨어진 지지율로 고심했다. 일본 정계에서는 총리가 G7 정상회의 이후 사임할 것이라는 시나리오가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졌다. 연이은 외교 성과에 최근 지지율이 50%를 회복했지만 ‘마음 아프다’ 발언은 지지율이 다시 하락하는 것을 각오한 것이란 해석이 나온다.

두 정상이 지지율 하락을 감수한 이유는 “한국과 일본은 동북아시아의 엄중한 안보 상황에 직면해 있다”는 두 정상의 발언에 담겨 있다는 게 외교가의 평가다. 북핵 확장억제뿐 아니라 공급망 협력 등 경제 안보를 위해서도 양국 관계 개선을 더 이상 늦출 수 없다는 판단이 깔려 있다는 뜻이다.

양국 모두 미국과의 동맹 강화가 절실한 시점에서 한·일 관계 개선을 원하는 미국의 요구를 모른 척할 수 없었다는 분석도 있다. 미국 국무부는 한·일 정상회담 직후 브리핑에서 “우리는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 및 윤석열 한국 대통령의 리더십을 평가한다”고 했다.

도쿄=정영효 특파원 hug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