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빛 아래 홀로 술을 마시며(月下獨酌)

꽃밭 한가운데 술 항아리
함께할 사람 없어 혼자 기울이네.
술잔 들어 밝은 달 청하니
그림자 더불어 셋이 되었구나.
저 달은 본시 마실 줄 몰라
한낱 그림자만 나를 따르네.
그런대로 달과 그림자 데리고
모처럼 봄밤을 즐겨보리라.
내가 노래하면 달은 나를 맴돌고
내가 춤추면 그림자도 따라 너울
깨어 있을 때는 함께 어울리다가
취한 뒤에는 제각기 흩어지겠지.
아무렴 우리끼리 이 우정 길이 맺어
이다음 은하 저쪽에서 다시 만나세.

* 이백(701~762) : 시선(詩仙)으로 불리는 당나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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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과 그림자 데리고 봄밤을
내가 춤추면 그림자도 따라 너울

오래전 봄날이었습니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중에 잠시 여유가 생겼죠. ‘오늘 같은 봄밤에는 이백과 술이나 한잔할까.’ 운현궁 맞은편에 있는 한옥 레스토랑 ‘민가다헌’으로 갔습니다. 구한말 외교구락부 분위기의 제법 근사한 집이었지요. (지금은 문화재 보호를 이유로 문을 닫았습니다.)

호방한 노래 속에 숨겨진 사연

그날 자리를 잡고 와인을 주문한 뒤 『당시선(唐詩選)』을 한 페이지씩 넘겼죠. 술 한 모금에 시 한 편이라…. 봄밤의 엄청난 사치였습니다. 삼십 수쯤 읽었을까요. 주변이 좀 조용해졌습니다. 넓은 홀이 꽃밭처럼 보였지요. 밖을 내다보니 달빛도 교교했습니다.

그때 꽂힌 시가 바로 이백의 ‘달빛 아래 홀로 술을 마시며(月下獨酌)’였습니다. 1300년 전 시선(詩仙)이 남긴 절창이지요. 오늘 소개한 부분은 전체 4수 중 1수인데, 호방하고 낭만적인 것 같지만 사실 이 시에는 시인의 근심이 숨겨져 있습니다.

이백은 40세가 넘어서야 겨우 관직을 얻어 현종의 주변에 머물게 됐죠. 그러나 자신이 원하는 정치적 이상을 실현할 수는 없었습니다. 결국 1년 반 동안의 짧은 관직 생활도 끝나고 말았죠. 이렇게 고난과 실의에 빠져 쓸쓸하고 외로운 시간을 보낼 때 자신을 달래려고 지은 것입니다.

시에 드러난 즐거움과 쾌활함도 근심을 가리기 위한 도구인 셈이지요. 영원한 우정을 기원하지만 그 또한 기약일 뿐, 취한 후에는 서로 흩어질 운명을 아쉬워하고 있습니다.

어떻든 그날 하늘의 ‘달’과 ‘나’와 ‘그림자’가 함께 봄밤을 지내는 기분은 아주 특별했습니다. 멀리 있는 문우(文友)에게 시를 읽어주려고 전화를 걸었죠. 그런데 그도 이미 봄밤의 호사에 겨웠는지 전화기를 꺼놓고 어딘가로 잠적했습니다. 할 수 없이 달그림자를 데리고 앉아 소리 내어 시를 읽어줬지요.

꽃잎 한 점 질 때마다 봄날이 줄어들거늘

몇 번을 읊조리다 보니 달이 기울었습니다. 이런 여유를 얼마 만에 누려 보는가. 맑은 별이 몇 점 반짝거렸죠. 그러고 보니 ‘봄밤에는 왜 울고 싶어지는가’라고 묻던 친구는 오늘 밤 양수리의 다산 생가 앞 어디쯤서 강물에 버들잎을 띄워 보내고 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이렇게 혼자 즐기는 맛을 그는 이미 체득하고 있었을까요. 누구보다 ‘꽃잎 한 점 질 때마다 줄어드는 봄날’(두보의 ‘곡강이수’)의 아쉬움을 아는 그였습니다. 그날 저는 옛사람과 마주 앉아 깊고도 부드러운 달빛을 음미하며, ‘흐르는 저 강물에 물어보게. 우리들 석별의 정과 강줄기 중 어느 것이 더 기냐고’(이백)라던 시구까지 읊조렸지요.

가끔은 홀로 시간을 보낼 일입니다. 시가 있고, 달빛이 있고, 그림자가 있으니, 진흙탕 같은 세속도시에서 이 얼마나 한가로운가요. 세상일에 치여 여유를 잃고 사는 우리에게 ‘달빛 아래 홀로 술을 마시’는 순간은 ‘이다음 은하 저쪽에서 다시 만날’ 시공의 한계를 뛰어넘는 ‘꽃밭’이기도 하지요.

진정으로 자신을 돌아보려면 이백처럼 홀로 있는 시간이 필요한 듯합니다. 인생에서 큰일을 이뤄낸 다음이나, 아까운 걸 놓쳐 평정심을 잃기 쉬울 때는 더더욱 그렇겠지요.


■ 고두현 시인·한국경제 논설위원 : 199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늦게 온 소포』, 『물미해안에서 보내는 편지』, 『달의 뒷면을 보다』 등 출간. 시와시학 젊은시인상 등 수상.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