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호 칼럼] 한국 바이오, 죽음의 계곡 건너려면
일본 제약사 다이이찌산쿄가 기타모토에 코로나19 mRNA(메신저 리보핵산) 백신 공장을 짓고 내년부터 생산에 들어간다. 미국 화이자, 모더나에 이어 세 번째다. 두 회사는 코로나19 백신으로 작년까지 각각 35조원, 23조원가량을 벌어들였다. 세포 속 단백질 제조 공장에 설계도를 운반하는 유전물질인 mRNA를 이용한 치료제는 활용도가 무궁무진하다.

앞서 다이이찌산쿄는 게임체인저로 떠오른 ADC(항체약물결합체) 기술을 활용한 유방암 치료제 ‘엔허투’를 영국 아스트라제네카와 공동 개발했다. 항체에 약물을 붙여 특정 암세포만 정밀 타격하는 ADC 항암제는 ‘암 잡는 유도탄’으로 불린다. 다이이찌산쿄는 엔허투 기술 수출로 8조원을 벌었고 위암 폐암 등에도 속속 적용할 계획이다. 또 다른 일본 제약사 에자이는 미국 바이오젠과 함께 그동안 치료제가 전무했던 알츠하이머 신약(레카네맙)을 개발했다. 제약산업 기반인 생리의학 분야에서 노벨상 수상자를 5명 배출한 일본의 저력이 느껴진다. 2018년 ‘차세대의료기반법’을 통해 의료데이터를 활용한 신약 개발을 지원한 일본 정부의 노력이 결실을 보고 있다. 인공지능(AI)·빅데이터 기반 신약 개발을 위해 정부가 주도한 산학연 컨소시엄엔 NEC 등 정보기술(IT) 업체와 제약사, 대학 등 99곳이 참여했다.

바이오·제약 분야는 반도체·배터리를 능가할 미래 먹거리지만 국내 바이오산업 생산 규모는 글로벌 시장의 3% 수준에 불과하다. 최근 5년 내 미국 식품의약국(FDA) 승인을 받은 ‘퍼스트 인 클래스 혁신 신약’(치료제가 없는 질병을 고치는 세계 최초 신약)은 미국 66개, 유럽 25개, 일본 6개인 데 비해 한국은 제로(0)다.

국내 대표 바이오 기업인 삼성바이오로직스 SK바이오사이언스 셀트리온은 수탁생산이 주력이다. 블록버스터급 신약(연매출 1조원 이상) 개발에 뛰어들어야 할 바이오벤처는 자금줄이 끊겨 빈사 상태다. 지난해 바이오 기술특례 상장으로 기업공개(IPO)에 성공한 업체는 8개로 2020년(17개)의 절반도 안 된다. 벤처캐피털(VC)의 작년 국내 바이오의료 투자액은 전년보다 34.1% 줄어든 1조1058억원에 그쳤다. 정부가 추진 중인 5000억원 규모의 ‘바이오 메가펀드’는 명칭이 무색할 정도로 금액이 적은 데다 민간의 참여 주저로 더 쪼그라들 전망이다.

글로벌 바이오산업 시장 규모가 2027년 1조8000억달러로 반도체를 넘어설 것이란 전망이 나오지만, 큰 그림을 그릴 컨트롤타워도 안 보인다. 보건복지부는 바이오산업 육성 의지가 약하고, 식품의약품안전처는 규제 기관이어서 과학기술정보통신부로 소관 부처를 옮겨야 한다는 말도 업계에서 나온다. 한국제약바이오협회는 지난달 말 바이오 펀드 규모 1조원대 확대와 국무총리 직속 ‘제약바이오혁신위원회’ 설치를 정부에 건의했다.

디지털 전환 흐름에 올라탄 바이오산업은 혁신기를 맞았다. 신약 개발에 통상 10년 이상이 소요되지만, AI·빅데이터를 활용한 화이자와 모더나는 10~11개월 만에 코로나19 백신을 내놨다. 구글 자회사 딥마인드, 페이스북 모회사 메타 등도 AI 신약 개발에 뛰어들었다. 양질의 의료 빅데이터와 디지털 기술을 접목하면 한국에도 기회는 있다. 하지만 국내 주요 바이오·제약 기업 대부분은 성공 확률 30%인 임상 2상 단계를 진행 중이어서 ‘죽음의 계곡’을 지나고 있다. 옥석 가리기를 통한 선택적 지원이 절실한 이유다. 바이오를 국가 핵심 전략산업으로 키우려면 ‘반도체특별법’처럼 ‘바이오특별법’ 제정도 검토해야 한다.